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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감정인의 삶, 행복과 보람
글. 이대주 감정평가사(중앙감정평가법인 본사)

매년 8~10월이면 차기 연도 공시지가업무를 준비한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전 국토에 대한 지가산정업무의 기준이 되는 중대한 지표이며, 나아가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된다. 이 업무는 국가의 공적 업무이자 대량감정평가 업무로 전산 프로그램상 제일 발전했지만, 까다로운 개별공시지가 검증까지 포함하면 1년 내내 이어지는 힘든 업무이기에 웬만하면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공시지가업무를 앞다퉈 맡으려던 옛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느 날 법인의 총무이사가 공시지가제도가 바뀌어 3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감정평가사가 공시지가업무에 참여해야 하는데, 내게 그 업무를 해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내년이면 법인에서 제대(주식 반납)하는 내게 그 요청을 하는 총무이사는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제일 중대하고 전산상으로 완벽한 국가업무에 동참하면서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능력을 가늠해 보고 사회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에 참여를 수락했다. 궁금한 마음에 담당 지역이 어디냐고 물으니 전라남도 진도라고 했다. 여기서 400km가 넘는 곳이라 고민하긴 했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해보겠노라 다짐하며 준비했다.
담당 지역의 1,200여 개 표준지를 주어진 일정 내 조사하기 위해 마음이 바빠졌다. 먼저 차남의 소개로 용산전자상가에서 공시지가업무용 최신 노트북을 구입했다. 이후 코로나19의 여파로 2020년 8월부터 시작된 비대면 온라인 교육 130여 시간을 수강하고 9월 중순 온라인 시험을 통해 숙지도 평가에 합격했다. 각 필지의 현장조사를 통해 토지 특성 확인과 현장 사진을 스마트폰에 올려야 했기에 마음이 바빴다.

오랜만에 표준지 공시지가 조사·평가업무에 참여하게 되어 그런지 담당한 물량이 많게 느껴졌다.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일정에 맞춰 젊은 평가사에 보조를 맞춰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현장조사에 나서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2020년 9월 21일(월) 이른 새벽에 400km의 진도행을 시작했다. 장시간 운전으로 피로가 누적됐지만 두어 차례 휴식을 취하다 보니 어느덧 진도군청에 도착했다.
오전 10시에 진도군청에 들러 첫인사를 하고 협조 사항을 듣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민원봉사과 담당 주무관과 팀장에 인사를 나누는데, 팀장이 걱정하는 기색으로 내게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지 물었다. 그래서 전에도 온라인으로 검증을 해보았다고 답했다. 담당 과장은 회의 중으로 기다려야 만날 수 있다기에 점심시간에 맞춰 오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군청 주변의 표준지 조사에 나섰다. 조밀하게 붙어있는 표준지를 일일이 차를 몰아 다니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보로만 다니기에는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날로 장남에게 전화를 걸어 가성비 좋은 킥보드를 얼마면 살 수 있는지와 배송까지 며칠 정도 소요되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정오가 다 되어 군청으로 돌아왔는데 회의가 길어지는 탓에 담당 과장을 바로 만날 수 없었다. 담당 주무관과 식당으로 먼저 향했다. 곧 담당 과장과 몇몇 팀장들, 직원들이 왔고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했다. 메뉴는 해물 순두부였다. 맛있었다.
진도는 역사적으로 명량해전의 대승을 거둔 곳이기에 나 또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마음으로 표준지 현장조사와 사진 촬영, 토지 특성 확인에 열을 올렸다. 아들은 가성비 좋은 킥보드는 70만원대로 주문하면 일주일 내로 도착한다고 말해줬다.
소개받은 모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 식사 후 현장조사를 나가면 오전 9시경이다. 그때부터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인 오후 5시 30분까지 계속해 표준지 조사를 했다. 3일째 되던 날 담당구역의 전체를 살피기 위해 한 바퀴를 돌아보기로 했다. 처음 접하는 곳이라 지역을 익혀 가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길이 있을 줄 알고 들어갔다가 후진으로 나오기를 여러 번, 좁은 논두렁에서 차를 돌리려다 조수석 앞바퀴가 빠져서 애먹었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현장 사진을 찍고 토지 특성이 맞는지 확인하는 일은 수고스럽지만, 국민의 소중한 재산(토지)의 현황을 파악하는 일은 나름 보람찬 일이었다.
오랜만의 공시지가업무라 그런지 생각보다 능률은 저조했지만, 킥보드가 도착하면서 현장조사에 속도가 붙었다. 표준지가 모인 곳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고, 그 주변은 킥보드를 이용해 신속히 조사하여 사진 촬영을 했다. 높은 곳의 표준지에는 킥보드를 1단으로 놓고 킥보드가 나를 끌고 올라가게끔 했고, 그 덕분에 신속하게 오르내릴 수 있었다. 그야말로 문명의 이기인 킥보드의 유용함에 고마움을 느꼈다.
한 번은 현장 촬영 사진, 조사 자료를 올리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도 해 협회 담당자에게 투정을 부렸지만, 내심으로는 토지 특성과 지적도, 전년도 사진 등의 자료를 스마트폰으로 받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정리하고, KAIS 프로그램을 통한 가격작업 또한 나에게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2020년부터 한국감정평가사협회가 개발한 KAPA-HUB 프로그램과 KAPA-HUB 공시지가 앱이 도입되고, 한국부동산원의 KAIS 프로그램이 활용되었다. 현장을 찾아가서 스마트폰으로 토지의 특성을 확인하고, 특이사항은 메모하고, 현장 사진을 촬영하여 스마트폰에 업로드하면 붉은색이 녹색으로 바뀌어 입력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으므로 누락 없이 정확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조사한 결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놀랐다.
평가업계에 약 41년(옛 한국감정원에서 20년, 외부 법인에서 21년)을 몸담고 있었고, 각종 국제회의(제29차 멕시코 PPC 회의, WAVO 등)에 참석하여 발표까지 해본 사람으로서 우리 공시지가업무는 세계 1위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전산 프로그램을 통해 공시지가 업무가 이렇게 정밀하게 이뤄진다니 그 정확한 기법은 자부할 만하다.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노력과 지혜를 보태주신 많은 전문가와 국토교통부, 한국감정평가사협회, 한국부동산원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공시지가 앱 사용을 기피하는 일부 감정평가사도 있지만, 나는 진보된 전문 기술이 자리매김하고 여기에 드론 등이 접목된다면 앞으로도 세계 1등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직접 사용하고 연구하여 더욱 나은 것을 창조해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공시지가업무에 임하는 터라 사무실에 계신 젊은 평가사님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했는데, 그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대부분의 감정평가사는 이 공시지가업무를 위해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주말도 없이 애쓴다. 일정에 맞추기 위해 여관방에 묵어가며 고생하는 동료도 다수 보았다. 안타깝지만 공시 일정이 촉박한 편이라 보조를 맞추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도읍 공시지가업무를 담당하면서 현장조사 중 여러 차례 만난 분이 있다. 군청 앞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분인데, 하루는 조사를 마치고 저녁 늦게 귀가하면서 식사를 하셨는지 여쭤보다가 함께 식사도 하게 되었다. 그분은 진도 토박이로 초·중·고등학교도 그곳에서 졸업하여 주변에 군수님을 포함한 친구가 많았다. 나에게 연세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기에 용띠라고 했더니 자신보다 4살 더 드셨다며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분이 인근에 모텔을 운영하는 친구까지 소개해 주어 아우 두 사람이 생겼다. 함께 저녁 식사도 하고, 당구와 탁구도 즐겼다. 시골 장날의 풍경에 젖어보기도 하고, 지역의 새로운 소식도 들으며 외롭지 않고 보람되게 지냈다.
표준지 공시지가 조사·평가라는 공무로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이룬 울돌목을 만나게 해준 국가와 법인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감정평가사로서 보람차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 사진. 진도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