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고령층, 아파트는 적합한 주거 형태일까?
앞선 이야기는 현재 고령층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곧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1명은 만 75세 이상이 된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30년에는 만 75세 이상 ‘후기 고령자’ 인구가 530만 명까지
늘어난다고 한다. 30대 직장인 초년생들이 은퇴할 때쯤이면 1,000만 명 이상이 만 75세 이상이다. 청년층이 그 많은 노인들을 먹여 살릴 순 없다 보니, 은퇴한 이후로도 내 스스로 살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요즘 노년층은 건강하게 오래 산다. 그래서 ‘액티브 시니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퇴할 때 빚 없는 아파트 한 채 갖고 있는 게 대한민국 평균인데, 최근 취재하다가 만난 한 건축가는 “아파트가 노인들에게 적합한 주거
형태는 아니다. 고독사하기 딱 좋은 구조다.”라고 말했다. 아무도 없는 아파트, 그리고 지하철만 오가는 현실. 집이 있어도 거동이 불편해지면 더 난감하다. 실버타운을 기획한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오랜 기간 지병을
앓고 있는 우리 부모님도 집은 갖고 계시지만 가족들이 직접 간병을 맡고 있다.”라고 했다.
실버타운을 취재하면서 수도 없이 들은 얘기가 “고소득층 어르신은 고급 주거시설에서 잘 계시고, 저소득층은 임대주택을 활용하신다. 그런데 중산층이 계실 곳이 없다.”라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을 비롯해 부동산
개발 시행사와 금융사까지도 같은 얘기를 한다. “나이가 들면 젊을 때처럼 집 한 채 있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다. 당장 40대가 된 선배들도 부모님을 어디에 모실지 고민하는 걸 보면 와닿는 게 있다.” 실버타운을
원하는 노인들도 많다. KB국민은행이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고령층 3,000명 중 60.7%는 실버타운에 ‘거주하겠다’라고 답했다.
안정적인 여건의 시설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
물론 제도적으론 어르신을 위한 시설이 꽤 있다. 소득 최상위 계층을 위한 노인복지주택이 대표적이다. 요즘 서울 도심에 들어서는 고급 노인복지주택은 직장인에겐 ‘강남권 대단지’ 아파트 만큼이나 ‘꿈의 주거 공간’으로
꼽힌다. 직접 들어가 보면 신축 아파트 커뮤니티가 부럽지 않다. 골프 연습장과 사우나는 기본이고, 24시간 간호사 상주, 운동 처방, 영양 관리, 컨시어지, 하우스 키핑, 골프 멤버십, 호텔 회원권, 공예 등
취미시설도 갖춰놨다. 비용은 기본이 보증금 6억 원에 월 이용료 400만 원. 전세보증금으로 환산하면 15억 원이다. 이곳에 사는 어르신 대부분은 원래 살던 집을 월세로 주고, 임대료를 월세로 내는
자산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문제는 ‘제대로 된’ 시설에 들어가려면 기본 1~2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에 노인복지주택은 8,000여 실 정도 있다. 전체 복지시설을 통틀어도 약 2만 명만 머무를 수 있다. 보증금 9억 원에
임대료가 450만 원인 최고가 요양 시설도 최대 3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중산층 액티브 시니어를 위한 주택은 아예 없다. 원래 살던 집에 머물다가 가족들이 부양할 수 없으면 지방 요양원으로 간다. 정부가 급여비
80%까지 보조해 주지만 노인들도 가기 싫어하는 ‘기피 시설’처럼 인식되는 게 현실이다. 가족들이 지방에 있는 부모를 찾는 횟수는 평균적으로 월 2회, 심지어는 연 2회도 종종 있다고. 지내는 여건도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부분 4인실이기 때문이다. 장기요양급여가 4인실 기준으로 지급되는 탓이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조차 주변 어르신들과 공유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족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도시 속 요양원은 극히 적다.
금융사가 운영하는 1~2인실 위주 요양원은 가족들이 찾는 횟수가 월 17회일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고 하는데, 300명 정원에 입주를 기다리는 인원이 6,000명이나 밀려있다고 한다.
2015년 금지됐던 ‘분양형 실버타운’··· 부활하나
고령화는 예전부터 예측이 됐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정책 번복’을 지적한다. 더 과감하게 공급할 시점에 정부는 실버타운 공급을 조였다. 2015년 분양형 실버타운을 금지했다. 임대형 실버타운은 운영업체가
소유권을 갖고 거주자는 세입자로 들어오되 높은 관리비를 내면서 요양 서비스를 받는 방식이다. 반면 분양형 실버타운은 아파트처럼 노인들이 소유권을 갖고 운영업체의 요양 서비스에 대한 이용료를 낸다. 각 호실마다
소유권자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실버타운은 건설 기준이나 부지 확보 등이 아파트에 비해 각종 규제가 덜 적용돼 공급이 쉽다. 하지만 불법 분양 등 부작용이 일부 나타나자 2015년 법을 바꾼 것. 당초 대상이었던 60세 이상 어르신이 아니라
일반 분양을 한 게 문제였다. 분양형과 달리 임대형은 초기 투입한 자본을 회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높은 월 이용료를 걷을 수 밖에 없다. 고가의 노인복지주택만 간간히 생겨나게 된 이유다. 운영사
입장에서도 연간 수익률이 1~2%에 그친다고 하니 적은 공급도 이해가 된다.
최근 정부 정책도 흐름이 바뀌고 있다. 분양형 실버타운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규제 완화를 통해 각종 요양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고령자 복지주택’을 2027년까지 2만 실 공급하기로 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좀 더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다. 서울시는 병원 근처에 주변 임대료의 최저 35% 수준인 ‘어르신 안심주택’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민간 사업자에겐 가구 수의 20%를 일반에 분양하는 특혜도
안배했다.
사실 이런 분양전환형 어르신 안심주택은 우려도 뒤따른다. 10년의 의무 임대 기간이 끝나면 임차인인 어르신들은 80대가 된다. 분양전환 때 어르신들이 갈 곳을 구하지 못하면 거리로 밀려나게 된다는 얘기다. 분양전환
이후 집주인이 계속 실버타운으로 둘 것인지도 미지수다. 도심에 공급될 분양형 실버타운은 호실별로 나눠서 소유권을 갖게 되면 누가 실버타운의 운영을 맡게 할 것인지도 이슈가 될 것이다. 일각에선 건물 전체를 운영업체가
임차해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어떠냐는 의견도 제기된다.
중산층 액티브 시니어를 위한 주택은 아예 없다.
원래 살던 집에 머물다가 가족들이 부양할 수 없으면
지방 요양원으로 간다.
정부가 급여비 80%까지
보조해 주지만 노인들도 가기 싫어하는 ‘기피 시설’처럼
인식 되는 게 현실이다.
도심, 지방 특색에 맞는 실버타운도 조성 중
민간에선 대형 건설사나 금융사를 중심으로 중산층을 위한 도심 실버타운 조성이 시도되고 있다. 한 금융사에선 2023년 말경 서울 북한산 자락에 액티브 시니어들이 10~20평에 머물 수 있는 시설을 내놨다. 눈여겨볼
건 보증금이 3,000만 원, 월 이용료는 2명 당 318만~
457만 원으로 기존 시설보다 저렴하다는 점이다. 스파와 피트니스 시설, 24시간 응급 대응, 실시간 건강 모니터링, 하우스 키핑 등도 갖췄다. 이 금융사는 서울과 경기권 도심에 세 개의 요양원을 더 짓고 있다.
모두 4인실이 아니라 1~2인실 위주다. 병원 재단이 출자해 여섯 곳의 실버타운과 요양원을 운영하는 어르신 특화 주택 전문 개발·운영사도 등장했다.
지방에는 부부 기준 월 200만 원에 텃밭을 일구고 문화생활을 하는 실버타운도 있다. 때론 실버타운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을 통해 돈을 버는 어르신들도 있다고 한다. 이미 존재하는 아파트에 ‘어르신 특화’ 서비스를
넣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강남권 최고급 재건축 아파트 모델하우스는 어르신이 자는 동안 실시간 헬스케어를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갖췄다. 집에서 비대면 진료를 즉석에서 약 처방도 받을 수 있다.
선거 때문일 수도 있으나, 그림자 속에 있던 어르신 주거 공간이 간만에 조명을 받게 됐다. 외국에서도 도심에서 실버타운이 제대로 공급된 사례는 흔치 않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노년층을 위한
주택 공급은 지금이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더 이상 정책이 뒤집어 질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어르신들이 도시를 배회하는 일 없이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주거 모델이 본격적으로 공급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