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PA 인사이트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 ‌이 글은 배명부 감정평가사님(명문감정평가법인 강원지사)께서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책을 요약하여 기고한 글입니다.

저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지음,
이웅현 옮김
페이지 수 689쪽 발간일 2019. 9. 23.

들어가면서

이 책은 1938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전쟁사학(戰爭史學)의 위용을 갖춘 대역작이다. 그는 도쿄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한 후 1998년까지 도쿄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및 소장을 역임하였다. 러시아사, 소련사, 조선사, 현대북한사 등 동북아국제관계사가 주요 연구 분야이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민주화운동일본연대회의와 연대위원회에서 사무국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전쟁』(1999), 『한일100년사』(2015), 『북한현대사』(2014),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2013), 『‘평화국가’의 탄생; 전후 일본의 원점과 변용』(2015),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2016), 『러시아혁명, 페트로그라드 1917년 2월』(2018) 등이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대작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연구의 종합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름은 ‘러일전쟁’이고, 내용은 ‘동아시아전쟁’이지만 본질은 ‘조선 전쟁’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러일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견해

현재 일본에서 국민의 러일전쟁 인식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문학자 시바 료타로의 작품 『언덕 위에 구름(坂の上の雲)』이다. 1968년 봄부터 『산케이신문(産経新聞)』에 연재하기 시작한 이 작품은 1969년 봄부터 분게이 주(文藝春秋)사가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책 후기에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유럽적인 의미의 ‘국가’(바로 유럽제국주의의 반열에 올라있다는 우월감)로 탄생했다. 일본인들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체험자로서 그 신선함에 들떴다. 이 애처롭기 짝이 없는 들뜬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단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다. 시바는 청일전쟁에 대해서도 “원인은 조선에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이나 한국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다면 조선반도(한반도)라고 하는 지리적 존재에 있다. 조선을 영유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조선을 빼앗길 경우 일본의 방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후세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변명하든 러시아는 극동에 대해서 지나치게 농후할 정도의 침략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라고도 했다. 시바는 이와 같은 러시아의 침략 열의와 마주하게 된다. 조선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한다.

근대 초기의 일본과 러시아

막말유신(幕末維新) 전야의 일본과 러시아

쇄국 시대에 일본은 네덜란드, 포르투갈과는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통해 교섭을 지속했다. 두 나라 말고 일본에 개국을 요구해 온 나라는 러시아였다. 1804년에 정식 국서를 가지고 레자노프가 방일했다. 그러나 일본은 사절을 되돌려 보냈다. 이후 교섭은 오랜 기간 단절되었다. 1855년 마침내 러일통교조약이 체결되었다. 1860년 6월과 1861년 3월 러시아 함대의 침략적 행위는 막부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화해 메이지유신의 직접적 전제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관심과 러시아

1868년 메이지유신을 완수하고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은 러시아와의 국경 확정과 함께 오키나와(沖龜)를 영토로 편입하면서 타이완에도 출병해 청국과 영토 확정을 도모하였다. 조선과는 새로운 국가 관계의 확립을 지향했지만 난항을 거듭했다. 이에 1870년에는 벌써 최초의 조선출병론이 제안되었고, 1873년에는 정부 사절의 조선 파견이 결정되었다. 조선이 사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대를 파견한다는 정한론(征韓論)에 기초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유럽파견사절단이 귀국하면서 이러한 결정은 백지화되었다. 그 후 일본 정부도 조선과의 교섭에는 뜻이 있었지만 조선 정부가 계속 응하지 않으면서 국교는 단절된 상태였다. 1874년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는 홀로 조선으로 파견되어 조선 관리와 대화에서 러시아의 위협을 거론했다. 1876년 2월 강화도사건(운요호사건)의 책임 추궁을 내세우며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가(黑田淸隆)가 부전권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서울에서 조일수호조규(朝日修交條規)를 체결시켰다. 이는 일본이 구미로부터 강요당한 것과 같은 불평등조약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조선에 대해 기회를 기다리는 정책(待機政策)을 견지하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 암살과 조선의 군란

1882년 5월 미국과 조선이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6월에는 영국과 독일이 잇달아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신외상 기르스도 당연히 정책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톈진 영사 베베르가 조·러 국교 수립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한편 조선 국내에서는 1882년 7월 개국정책에 불만을 지닌 구식 군대의 병사들이 대원군을 등에 업고 반란(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일본 공사관은 불태워졌고, 신식 군대의 일본인 교관은 살해당했다. 분노의 표적이 된 명성황후는 궁전을 탈출했다. 일본의 하나 부사가 1개 대대의 호위병을 이끌고 (지금의) 서울에 진입하자, 청국은 종주국의 면목을 세운다면서 이를 상회하는 병력을 서울에 투입했다.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청국은 사태를 수습하는 방향으로 선회해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해 갔다. 8월 30일 하나 부사는 조선에 배상금 지불과 일본군 주둔 규정을 포함한 제물포조약을 조인하도록 했다. 러시아 정부는 계속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국교 수립으로 방향을 잡았다. 1884년 7월 19일 러시아와 조선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양국은 국교를 수립했다.

일본의 러시아경계론

조선을 노리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당연히 러시아가 조선에 손을 뻗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정부 각 부처에서 조선을 둘러싼 대러시아 방벽책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가 1882년 9월 17일 자로 쓴 문서인 대표적인 의견 ‘조선정략의견안’을 보면, “···동양의 균세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지나(중국)와 우리가 힘을 다해 조선의 독립을 보호하고 러시아의 남침을 막아야만 한다. 러시아에게 조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러시아를 제외한 5개국(일본, 청국, 미국, 영국, 독일)이 보장해 조선을 벨기에나 스위스 같은 중립국으로 하는 것이 대응책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을 청국과의 종속관계에서 해방시키는 방책이기도 했다. 이때 조선 내부에서는 부활한 명성황후가 청국의 비호를 받아 왕권 강화를 도모하려 하자, 1884년 12월 4일 친일개혁파인 김옥균, 박영호 등은 대원군과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본군 150명이 출동한 가운데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명성황후 일파를 배제하려는 쿠데타를 단행했다. 그것이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청국군 1,300명이 왕궁을 공격해 쿠데타는 제압되었다. 이에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를 전권대사로 임명해 2개 대대의 병력과 함께 조선으로 파견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인 거류민의 살해, 공사관 파괴에 대해서 보상할 것을 수락했다. 일본의 민간 여론에서는 청국에 대항하여 일본이 적극적으로 조선의 사태에 개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본 정부 부처 안에서도 강경론이 있었지만, 청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1885년 4월 이토 히로부미가 전권대사로 청국에 부임했다. 그 후 에노모토 공사와 함께 리홍장과 교섭했고 4월 18일에는 이른바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에 대한 고종의 기대

이때 고종은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인 정치적 선택을 한다. 고종은 일본과 청국에 휘둘려 표류하는 가운데 나라와 왕의 운명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또 하나의 강대국 러시아에 의존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고종이 러시아에 처음으로 밀사를 보낸 것은 갑신정변 이전인 1884년 5월이다. 이후 독일인 폰 묄렌도르프의 권유로 러시아는 ‘방관자의 역할’에서 벗어나야 했다. 1885년 1월 1일 도쿄의 러시아 일등서기관 스페이에르가 묄렌도르프를 따라 국왕을 알현하는 기회를 얻었다. 러시아 외무성(기르스 외상)은 “어떤 경우라도 조선에서의 러시아 영향력을 높이는 것은 유익하다.”라고 했다. 청국을 종주국으로 따르면서 일본이라는 새로운 제국의 야망 앞에 놓인 무기력한 조선의 왕으로서는 제3국인 러시아에게 비호를 구하는 일이 하나의 선택지이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위험한 길이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격렬한 반응

위 사실을 뒤늦게 안 이노우에 외무경은 “조선 왕의 임정(臨政)을 약간 구속하고 외교상이 망동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라고 거친 말을 꺼냈다. 러시아와 손잡으려 했던 조선 왕을 어떻게든 눌러놓아야 했다. 이것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러시아의 위협을 설파하고 그가 생각하는 대처방안인 8개조 대강을 발표까지 했다.

고종의 대러 접근 제2막

청국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서울 주재 정부 대표로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고종과 조선 정부를 단단히 죄어갔다. 청국의 압력을 견딜 수 없던 고종은 러시아의 지지를 기대하면서 1886년 8월 5일 황후의 사촌 형제인 민영익을 베베르에게 보냈다. 민영익은 “만국 가운데 러시아만이 조선을 출구 없는 상태에서 구출할 수 있다.”라고 했다.

시베리아철도 착공

일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황태자 니콜라이는 1891년 5월 30일 시베리아철도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시베리아철도의 일부인 우수리 철도 기공식에 참석했다. 시베리아철도 건설로 농업 발전, 시베리아로 이민 촉진, 천연자원·물자원의 개발도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철도는 유럽과 태평양 및 아시아 동방과의 사이에 단절이 없는 철도 연락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러시아의 상업뿐만 아니라 세계의 상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길,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 건설에 착수했다는 뉴스는 오쓰사건으로 충격받은 일본 정부와 국민의 주의를 다시 끌었다. 1891년 3월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쓴 ‘외교정략론’에서 야마가타는 일국에는 ‘주권선’과 ‘이익선’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이다.”라면서 시베리아철도의 경계론을 펼쳤다.

청일전쟁과 전후 일본-조선-러시아 관계

일본의 조선 출병 결정

1894년 초부터 동학농민운동이 본격화되어 6월 1일 조선 정부가 청국에 출병을 요청했다는 전보가 일본 외무성에도 도달했다. 무쓰 무네미쓰 외상은 이대로 두면 조선은 청국이 하는 대로 맡겨둘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다면서, 청국이 출병한다면 일본 역시 톈진조약에 기초해 상당수의 병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2일 각의에서 혼성 1개 여단의 파견병력을 결정했다. 조선 정부에게서 받은 요청이 전혀 없었는데도 조선의 요청으로 출병하는 청국에 대항해 조선에 군대를 투입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

6월 21일 청국 정부는 반란이 진압되었기 때문에 양군은 철수해야 하며, 개혁은 조선 정부에 맡겨야 한다고 회답했다. 이에 대해서 무쓰는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책임과 자격(責守)을 갖추고 있지 않다. 일본은 조선에게 중대한 이해가 있으므로 수수방관하는 것은 ‘이웃 나라의 우의(友誼)’에 반하며 ‘우리나라 자위의 길’과도 어긋난다. 따라서 철병은 하지 않겠다.”라고 통고했다. 바야흐로 청국과 일본은 결정적인 대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때 파견된 일본군은 서울 용산에 주둔했다. 무쓰의 훈령은 “오늘날의 상황 전개상 개전을 피해서는 안 되며 어떤 수단을 택하든 개전의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판단과 일본의 반응

러시아(키시니)는 일본이 러시아와 청국의 참가를 배제한 채 조선의 운명을 자기 멋대로 지배하려 하고 있다고 보았다. 7월 15일 보가크는 청국과 일본의 전쟁 준비에 관해 “청국인은 일본이 군사적인 면에서 어떤 존재인지, 일본의 육해군은 어느 정도인지에 관해서 완전히 무지하다.”, “청국인이 아무리 행동하려고 해도 그들은 일대일 승부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점이 내게는 불변의 진리처럼 보인다.”라고 보고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모든 현에서 조선으로 보내 달라는 지원병 부대가 결성되고 있다. 모든 신문이 일본 정부의 정책을 시인했다. 일부 신문은 일본이 극동 문제에서 큰 목소리를 낼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정부는 더욱더 정력을 쏟으라고 요구했으며, 일본이 철군하지 않으면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7월 23일 사변– 조선전쟁의 개시

1894년 7월 23일 서울의 일본군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0시 30분 오시마 여단장은 오토리 공사의 연락을 받고 부대의 출동 명령을 내렸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왕궁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함화당(咸和堂)에서 총성을 듣고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 안으로 들어가서 국왕 고종과 대면하고 다음같이 구두로 전했다. “지금 의도치 않게 양국 군병이 교전해 전하의 마음(宸襟)을 괴롭게 한 것은 다른 나라의 신하 된 자로서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 병사들은 옥체를 보호하고 결코 전하에게 위해를 미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린다. 부디 전하께서 이 점을 양해하시라”

그리고 국왕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은 조선병 일소와 무장해제를 완료하고 궁전 주위에 일본 초병을 세웠다. 통상적으로 청일전쟁이라 부르는 전쟁은 바로 이때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공격한 것은 “일본군이 시내를 종단 중에 조선 경비대의 총격을 받았기 때문에 공격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오토리 공사가 취하는 행세의 특징은 정말 부끄러운 줄 모르는 거짓이며, 조선에서 일본인 자신들의 역할을 한정하겠다고 다른 열강 대표자들에게 했던 약속에 대한 신뢰를 결정적으로 깨뜨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선전쟁에서 청일전쟁으로

대원군과 일본 공사의 지휘하에 우선 정부가 개조되었다. 이들이 모인 합의체 행정기관인 군국기무소회의가 설치되었다. 일본은 이 신정권에 청국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강요했다. 7월 25일 오토리 공사의 강경한 요구에 따라 청국 대표에게 청한통상삼장정(淸韓通商三章程)의 파기를 통고했다. 여기서부터 조선전쟁은 청일전쟁으로 발전해 갔다. 이틀 후인 7월 27일 해상에서 먼저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아산 근처의 풍도(風島)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순양함이 청국 해군의 전함을 공격한 것이다. 이 해전에서 900명 이상의 청국 병사들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개전 조서의 핵심 부분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제국이 그 처음부터 계몽 인도해 열강의 대오에 선 하나의 독립국이다. 그러나 청국은 언제나 스스로 조선을 속국이라 칭하며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했고, 거기서 내란이 발생하자 ··· 조선에 출병했다.” 일본이 내놓은 조칙은 정말로 기만적이었다.

후쿠이 야스지로(福井安治郞), 「조서 경성왕국 도전도(挑戰圖)」, 판화, 1894
(출처: 한길사 제공)

일본의 조선 취급 방침

이런 가운데 일본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국에서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한 뒤 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기본 방침을 명확히 해야 했다. 8월 20일 오토리 공사와 외무대신 김윤식과 잠정 합동조관을 체결했지만, 이에 조선 정부와의 충돌 저항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는 혼란의 한 원인이 오토리 공사의 무능력에 있다면서 그를 경질하고, 내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를 후임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개전과 러시아의 입장

이때 러시아는 이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고 신속하게 양국이 정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도록 노력했다. “청일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립은 선언하지 않는다. 전쟁의 귀결로는 조선의 현상 유지(status quo)를 추구한다.”

러시아의 보가크는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는 일본이라는 극도로 위험한 이웃과 함께하고 있다. 이 나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몇 번이고 중시해야 할 것이며, 이 나라는 어떤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많은 불편을 끼치고 곤란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했다. 러시아의 태도는 신중했고 또 굳이 말하자면 소극적인 것이었다.

평양 대회전(大會戰)과 황해회전

9월 15일은 조선전쟁 최대의 회전인 평양 대회전이 치러진 날이었다. 청국군의 병력 1만 5,000명, 일본군의 병력 1만 6,500명에서 청국군 사망자는 2,000명, 부상자 4,000명, 포로 700명이었다. 일본 측 희생은 사망 102명, 부상 438명, 행방불명 33명이었다. 평양회전의 승리는 청일전쟁의 승패를 결정했다. 일본에서는 ‘평양대첩’이라고 해서 국민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하라다 주키치는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이틀 후 황해회전에서도 승리했다. 청군은 12척 가운데 4척이 격침되었다. 일본은 한 척도 가라앉지 않았다. 조선 배부에서는 항일, 반개화의 기치 아래 전봉준이 이끄는 제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군은 농민군을 철저하게 살육했다. 12월에는 전봉준이 배신을 당해 체포되어 일본군에 인도되었다. 이 작전은 조선전쟁의 가장 잔혹한 한 페이지다.

이노우에 공사의 개혁 시도

1894년 10월 26일 서울에 도착한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명성에 강한 자부심을 지닌 채 일본 점령군의 힘을 배경으로 조선 정부의 개조를 강력하게 추진하고자 했다. 그는 고종, 총리 김홍집, 대원군 등을 알현하고 설득에 나섰다. 이어서 이노우에는 11월 20일에 총리 이하 각 대신이 열석한 가운데 고종을 배알하고 개혁 강령을 강요했다.

전쟁의 종장을 둘러싼 움직임과 전투의 종결

1894년 10월 영국 등 강대국들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청국은 일본에 군비를 상환한다는 두 가지 조건으로 일본에 전쟁 중지를 제안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군사적인 보상 가운데 타이완의 양여를 추가할 수 있는 기회를 재빨리 정하는 것이 득책이었다. 12월 22일 무쓰 일본 외상은 히트로보 러시아 공사와 회담했다. 멍청한 히트로보는 일본이 제시하는 요구에 관해서 “조선국의 독립을 해하지 않는 한은 이에 간섭하지 않겠다.”, 또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타이완 점령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이 1894년 11월에 일본군은 랴오둥반도의 뤼순과 다롄을 점령했다. 1895년 1월 9일 다롄만을 출발한 육군부대는 그날 상륙해 31일까지 모든 포대를 점령했다. 이 상륙작전을 참관한 보가크는 커다란 문제가 되었던 뤼순 학살사건에 관해 “일본군이 정말로 무익한 진짜 살육을 저질렀다는 점은 의심에 여지가 없다.”라고 언급했다. 전쟁이 종결되어 가면서 보가크는 1895년 2월 28일 자 보고에서 일본군의 힘에 관해서 최종적인 평가를 내렸다. “우리가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본이라는 이웃나라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나로서는 어떤 의심도 하고 있지 않다··· 일본군은 지금 이미 훌륭하게 조직되어 있다. 군대에서의 책임감, 애국주의에 관해서는 뭐라 더 말할 것이 없다. 일본인들의 자질은 타고난 것이다. 국민적인 특징이다.”

전쟁 종결의 조건

전쟁이 끝나면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처분과 청국과의 강화 조건이 문제가 됐다. 조선을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삼고 있을 작정이라고 해도 국제공법상 독립국으로 대우하는 이상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었고 철수시켜야 했다. 이러한 시기에 러시아 장관들은 1895년 2월 1일 두 번째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전쟁 강화에 대비해 지금까지와 같은 신중한 태도를 취할 것인지, 아니면 독자 행동을 취할 것인지가 협의의 주요 내용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일본 해군을 능가할 수 있도록 극동의 해군을 증강한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과 청국의 교섭은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시작됐다. 3월 30일 우선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이어서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다. 4월 1일 일본 무쓰 외상은 “청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의 나라임을 확인한다.”라는 요구를 제시했다. 이에 청국은 “조선의 독립에 관해서는 일본도 인정한다는 규정을 넣을 것”이라는 반론을 주장했다. 이는 서로가 조선을 간섭하지 말라는 제국적 발상들이다. 4월 17일 일본의 재수정안을 기초로 한 시모노세키 조약이 조인됐다. 일본 국민은 새로운 영토를 획득한다는 환희에 흠뻑 젖었다. 엿새 후인 4월 23일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 공사들의 이른바 ‘삼국간섭’에 의해 랴오둥반도 획득을 포기했다. 『도쿄아사히신문』 5월 14일 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랴오둥반도 일대의 땅은 패배한 청국에 반환되었다. 진정으로 더할 나위 없는 은혜라 할 이 도량에 태산은 물론 강이나 바다도 그 크기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청국의 위아래 관민들은 한결같이 감읍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라는 기고만장, 안하무인, 유아독존의 글을 올렸다.

미우라(三浦) 공사의 등장

위와 같이 4월 23일에 발생한 삼국간섭과 일본의 굴복은 조선의 조야에 러시아의 힘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일본의 권위는 급속하게 저하되었다. 바야흐로 청일전쟁의 성과는 무위에 그친 것처럼 보였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해 일본 관계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노우에 공사의 정책이 실패로 분위기가 굳어지면서 공사 경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실각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호는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러시아에 대한 결정적인 대립 감정을 시바 시로(柴四朗)에게 전했다. 시바는 일본이 조선을 잃게 된다고 생각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9월 1일 서울에 부임했다. 서울에 와서 시바 시로와 함께 일등 서기관 스리무라 후카시, 주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등과 사태를 협의·분석하고 취해야 할 방침을 세웠다.

명성황후 시해

미우라는 “근래 왕비를 비롯한 민당(閔黨)의 무리가 러시아와 결탁해 점점 더 세력을 넓히고 내정개혁의 업(業)은 서서히 모조리 파괴되었다. 우리 장교들이 양성하는 훈련대 역시 민당이 획책해 일부러 순검 등과의 쟁투를 야기하고, 이를 구실로 결국 훈련대를 해산한 뒤 그 장교들은 모두 체포하여 살육하고, 민영준에게 국정을 맡겨 만사를 러시아에 의뢰해 우리로부터 이반하려고 계획했다. 바야흐로 오늘 우선 훈련대의 해산에 착수하려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주저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어찌 되었든 미우라 등이 도달한 결론은 대원군을 업고 쿠데타를 해 친러반일 세력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고종을 극한까지 위협해 일본에 복종케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이 방침은 이웃나라 조선을 지나치게 모멸하는 방침이었고, 일본이라는 나라 깊숙한 곳에 도사린 질병의 표출이었다. 실행부대는 이미 동원되어 있었다. 미우라는 10월 8일 새벽 4시로 정했다. 10월 5일 미우라는 다가올 행동을 미리 알리기 위해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대원군에 보냈다. “여우는 임기(臨機) 처분해라”라고 훈시했다. 명성황후 살해 지시였다. 마침내 건청궁(乾淸宮)에 도달, 곤녕각(坤寜閣)에 침입해 복장과 용모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 세 명을 살해(도륙)했다. 대원군은 강녕전(康寜殿)에, 고종은 장안당(長安堂)에, 왕비의 주검은 건청궁 동쪽에 있는 소나무 숲에 불태워졌다. 왕비의 허리에 매달린 주머니 속에서 러시아 황제에게 베베르의 유임을 요청하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편지 원고가 발견되었다. 왕비를 살해한 자는 훈련대 교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대원군과 신정부의 성립

고종이 느낀 공포감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그 공포감 그리고 분노가 아직 사그라지기 전에 공사 미우라가 고종을 방문했다. 알현 도중 미우라는 자리를 떠 명성황후의 유해를 확인하고 하기와라에게 소각을 지시했다. 대기하고 있던 대원군을 불러 고종, 대원군, 미우라의 3자 회담이 시작되었다. 미우라는 이미 대원군과의 사이에 합의되어 있던 방침을 고종에게 수락하게 했다. 개각과 함께 미우라는 고종으로 하여금 “국정을 간섭하고 정치를 어지럽힌 왕후 민씨를 폐비해 서인으로 낮춘다.”라는 칙서에 서명할 것을 약속하게 했다. 그것은 고종으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굴욕이었을 것이다.

러시아의 추궁

10월 8일 오후 3시 반에 열린 재경 외교사절 회합에는 모든 나라의 공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 회합이 끝난 뒤 각국 외교 대표들이 받은 인상은 이 전대미문의 끔찍한 사건은 전적으로 일본인들이 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베베르는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세계사에 전례 없는 범죄적인 사실과 마주하고 있다. 평상시에 타국 국민이 자국의 군대 그리고 아마도 공사관의 비호 아래, 아니 더 나아가 그 지도하에 대거 왕궁을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그 유체를 소각한다. 그리고 더욱이 일련의 추악한 살인과 폭행을 저지른 뒤 많은 사람이 둘러싸고 보는 가운데 자기들이 저지른 짓을 뻔뻔스럽게 부정한다. 이런 일은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분명 일본인들은 유럽 열강들이 조선에 무관심하고, 전혀 벌을 받을 우려가 없다는 점을 기회로, 더 이상 그 어떤 법에도 구속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 국내의 반응

이날 10월 9일 아침, 일본의 신문들은 이른바 ‘경성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오늘 아침 5시 대원군이 훈련대 2개 대대를 이끌고 왕궁에 돌입했다. 위병은 막을 수 없었다. 왕비의 소식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미우라 공사는 즉시 입궐했다.”, “두 병력이 상호 발포하고 막 일대 사건으로 커지려는 찰나, 우리의 미우라 공사가 대군주 폐하의 부르심에 따라 약간 명의 일본 병사들을 인솔하고 입궐한바, 두 병력은 겨우 4~5발 발포했을 뿐 진정되었다.”

이것은 사건 당일 오전 11시, 미우라 공사가 도쿄의 외무대신 임시대리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보낸 제1보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것은 완전히 도쿄를 기만하는 허위 보고였다. 미우라는 10월 8일 밤 10시 반에 깊이 있는 설명을 외상에게 보냈다. 일본인이 왕비를 살해한 것이 분명했다. 깜짝 놀란 사이온지 외상 대리는 9일 일찍부터 고무라 정무국장을 서울로 파견해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서울에서는 10월 10일에 왕비를 폐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그것은 일본의 신문들도 보도했다. 완전 왜곡이다. 왕비가 죽임을 당한 데다가 왕비를 모욕하는 이러한 조치의 발표까지 강요받은 고종이 마음속으로 일본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기분이었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고무라 조사단의 사건 처리

10월 15일 고무라 주타로 정무국장을 책임자로 하는 사건조사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10월 17일 일본 정부는 미우라에게 귀국 명령을 내리고, 고무라를 후임 공사로 임명했다. 10월 21일 일본 정부는 위문사절로 전 조선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서울로 보냈다. 미우라의 인상을 어느 정도 부드럽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11월 5일 우치다 사다쓰치 총영사는 장문의 보고서 ‘메이지 28년 10월 8일 왕성사변의 전말’을 사이온지 외상 대리에게 보냈다.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일을 기도하는 자들이 있어 오직 소시 무리뿐 아니라··· 당 영사관원 및 수비대까지 선동해 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한 행동을 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제국을 위해서 실로 유감스럽기 그지없을 따름입니다.” 이 보고서는 암흑 속에서 빛을 내뿜는 양심적인 고발 문서였다.

랴오둥반도 반환조약의 조인과 러·청 접근

11월 8일 일·청 양국은 랴오둥반도 반환조약에 조인했다. 청국은 평톈성 남부의 땅을 반환하는 대가로 일본에게 은 9천만 냥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삼국간섭 이후 청국도 러시아에 호의를 느꼈다. 결국 1895년 7월 6일 러시아 정부가 보증을 서고 프랑스와 러시아 은행이 추진하는 대청 4억 프랑, 금 1억 루블 차관의 외채모집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해 12월 22일 러청은행을 설립한다. 이 러청은행은 이후 러시아의 중국 진출에 주요한 에이전트(교두보)가 된다.

일본과 러시아의 군비 증강 계획

전쟁에 승리한 결과로 획득했다고 생각한 랴오둥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간섭으로 반환했고,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세력 하에 확실하게 두었다고 생각했던 조선도 이제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데 대해서 가장 분하게 생각한 것은 일본의 군 수뇌부였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주저하지 않고 군비의 대증강 계획을 추진했다. 이른바 6·6함대의 구상이었다. 해군 6척, 육군 6개 사단의 증설인 것이다. 한편 러시아도 대항계획의 입안을 서둘렀다.

러시아 군부와 지식인의 청일전쟁 연구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각국의 일본 관찰자들이 그간 지니고 있던 이해를 일변시켰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도 주재무관 보가크는 일본의 힘을 가장 예민하게 파악했던 사람이었다. 보고서에는 “우리 러시아인들은 엄격한 감시를 해야 하는 이웃을 일본에 얻은 셈이다. 육체적으로 일본 병사들은 젊고 쾌활하며,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고 인내심도 강하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일본 병사들은 많은 적극성을 지니고 있다. 명예심이 있고 달성된 승리를 자랑하며 새로운 승리를 꿈꾸고 있다.”, “일본이 그렇게 짧은 기간 내에 이륙해 중국과의 전쟁에서 증명한 힘 때문에도 특히 일본을 무시할 수 없다.”라고 쓰여있었다.

1900년에 사망한 철학자 블라디미르 소로비요프의 마지막 작품 『전쟁, 진보, 세계사의 종말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에서 그는 기독교 세계를 공격하는 몽골의 내습으로 일본의 움직임을 묘사했다. “모방이 특기인 일본인은 놀랄 만한 속도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유럽 문화의 물질적 형태를 채용하고 또 일부 낮은 수준의 유럽 사상도 자기 것으로 흡수했다. 신문이나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서방에 범헬레니즘, 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 범이슬람주의 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저들은 범몽골주의의 대사상을 선언했다. 즉 유럽인에 대해서 도전할 목적으로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을 하나로 모을 것을 선언한 것이다.”

러시아의 뤼순점령과 조차(1896~1899)

고종의 아관파천

1896년 1월 8일 베베르의 후임 대리공사 스페이에르가 서울에 도착했다. 1월 27일 스페이에르는 전보에서 “베베르와 나는 감히 생각건대, 우리의 개입으로 분규가 초래된다 해도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양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이곳의 상황에서 우리는 적극적인 역할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전보에서 스페이에르는 일본군 수비대에 필적하는 러시아군 병력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 고종은 2월 2일 단발령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황태자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싶다면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는 이범진을 통해서 베베르와 스페이에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군주가 수도 안에서 외국 공관으로 도주한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행동이다. 2월 11일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다. 조선 국왕 고종이 황태자와 함께 왕궁을 탈출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것이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일본이 받은 충격

이 사건은 일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고무라 공사는 당일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다. “조선에서의 일본의 권익은 이제 바람 앞의 등불 신세이며, 러시아의 힘은 압도적이다. 따라서 러시아와 대화를 해서 어떻게든 이 땅에 일본 세력이 발붙일 곳을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고무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도쿄아사히신문』은 2월 19일 자 1면에 ‘금후의 대한 정책’ 세 가지 방책을 제시했다. 제1책은 각국 공사들이 연합해 신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표명하고 러시아를 견제하는 방책, 제2책은 조선을 ‘열국 협동 보호국’으로 하는 방책, 제3책은 조선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수수방관책’을 취하며 ‘와신상담’해 후일을 도모하는 방책이었다.

채용신, 「고종 어진」, 1901, 원광대학교박물관
(출처: 한길사 제공)

페테르부르크와 도쿄에서의 교섭

서울의 양국 공사(일본의 고무라 공사, 러시아의 스페이에르 공사)는 본성과의 거듭된 의견 교환을 통하여 조율해 가고 있었다. 한편 2월 21일, 고종은 일본군이 체류하는 데 위험을 느끼고 있으며 러시아 수병의 경호가 없으면 왕궁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 요청을 실행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라는 전보를 보냈다. 일본의 특사 야마가타 원수는 1894년 11월 7일 ‘조선 정책 상주’의 초고를 작성, “조선의 국토를 청국 병사들이 유린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은 이미 완수했다.”라고 썼으며, 조선의 독립 가능성에 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조선의 전 국토를 일본의 지배하에 두겠다는 구상의 소유자였다. 요컨대 양국은 “조선은 자기 단독의 힘으로는 독립할 수 없는 나라이므로 러시아와 일본국이 협의함으로써 조선을 존립시키는 데 필요한 하나의 잠정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고무라-베베르각서 조인

일본의 고무라와 러시아의 베베르 전 대리공사 간에 몇 번의 수정을 거쳐 1896년 5월 14일, 각서에 조인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 폐하가 왕궁으로 환어(還御)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폐하 스스로의 재단에 맡기지만, 폐하가 왕궁으로 환어해 그 안전에 관해서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있을 때가 되면 일·러 양국 대표자는 환어할 것을 충고한다. 또 일본국 대표자는 일본 소시의 단속과 관련하여 엄밀한 조치를 취할 것을 보증한다.]

고무라는 이 조인을 마치고 귀국 명령을 받아 5월 31일 서울을 떠났다. 그 전날 밤 고무라는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1월 이후 조선 각지에서 살해된 일본인 43명, 부상자 19명의 보상으로 일본 은화 146,000엔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명성황후 시해에 관해서는 어떠한 표명도 하지 않았다. 고무라는 외무차관으로 승진했고, 조선 공사에는 하라 다카시(原敬)가 임명되었다.

러·청 비밀동맹조약과 동철도협정

한편 러시아에서는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청국 대표로 참석할 리홍장을 맞이해 페테르부르크에서 중요한 두 가지 교섭이 시작됐다. 시베리아철도 건설을 추진해 온 재무상 비테는 청국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 획득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청국과 러시아가 동맹을 맺고 대항하기 위해서 러시아군을 운송하는 철도의 건설을 인정하겠다는 논리였다. 1896년 6월 3일 페테르부르크에서 리홍장과 비테,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가 조인한 ‘러·청 비밀동맹조약’과 한 세트로 동철도협정이 성사된 것이다. 가장 핵심인 제1조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러시아령, 청국과 조선의 영토를 공격하면, 그 공격이 어떻든 본 조약을 즉시 적용하는 계기로 간주할 것이다. 이 경우 양 조인국은 그 시점에 소유하고 있는 모든 육해군 병력으로 상호 지지하며, 이들 병력에 각종 장비를 보급하는 데 가능한 한 상호 원조를 행할 의무를 진다.”였다.

러시아의 일본 특사 야마가타 아라토모(외상)

일본의 걸출한 정치가인 야마가타 원수는 5월 20일 모스크바에서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 외상과 최초의 상견례를 했고, 결국 5월 24일에 니시 공사와 함께 첫 회담을 했다. 6개 항의 협정안 중 ‘제1조 일·러 양국은 조선국의 독립을 상호 담보할 것’, ‘제5조 일·러 양국은 군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각각 그 군대 파견 지역을 분획한다. 한쪽은 그 군대를 동 국가 남부로 파견하고, 다른 한쪽은 북부로 파견한다.’는, 즉 조선의 독립을 존중하면서 조선을 남북으로 나누어 각각을 일·러의 세역, 즉 세력 영역으로 한다는 구상이었다. 야마가타의 중대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측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생각할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야마가타-로바노프협정 조인

896년 6월 9일, 야마가타와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는 ‘조선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의정서’에 조인했다. 핵심 내용은 제1조 일·러 양국 정부는 조선국의 곤란한 재정을 구제할 목적으로 조선국 정부에 대해서 일체의 헛된 비용을 없애고 또한 그 세출입의 평형을 유지할 것을 권고할 것이었다. (제2조~4조 생략) 그리고 여기에 비밀조항이 붙어 있었다. 조선국의 안녕과 질서 문란의 경우 양국의 군대 추가 파견 문제인 것이다.

조선 사절의 러시아와의 교섭

조선 사절 민영환 일행은 대관식에 참석한 뒤 6월 5일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거기서 민영환은 러시아 정부에 요망서를 제출했다. 5개 항목의 요구가 열거되어 있었다. [1. 조선군이 형성될 때까지 왕의 안전을 러시아군의 힘으로 지켜 줄 것, 2. 충분한 수의 군사교관을 파견할 것, 3. 세 명의 고문(궁내, 내각, 산업철도의 분야)을 파견할 것, 4. 300만 엔의 차관을 공여할 것, 5.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전신선을 부설할 것] 로바노프 외상은 조선에 대한 원조를 거부하지 않겠지만 일본과 싸우고 싶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고종의 환궁

조선에서는 1896년 초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중심 인물 서재필이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4월 「독립신문」을 창간, 7월 독립문 건설, 그리고 독립협회 설립, 아울러 독립관 건설을 이루었다. 1897년 2월 18일, 의정부 고관들과 대신들이 비밀회의를 열어 고종의 안전한 귀환을 보증하라고 주재무관 푸차타에게 서재필을 대표로 보냈다. 푸차타는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고관들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고종에게 귀환을 청했다. 2월 20일 드디어 고종은 375일 동안의 러시아공사관 체재를 마치고 세자와 함께 경운궁으로 귀환했다. 경비를 위해 수행한 것은 러시아인 군사교관이 양성한 1개 대대의 조선군이었다.

무라비요프 외상의 등장과 새로운 주일공사 로젠 발령

1897년 1월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 외상의 급사로 덴마크 공사 미하일 무라비요프 백작이 임명되었다. 무라비요프 외상은 조선과 일본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육군상에게 “조선에서 우리나라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당연히 일본의 시의심(猜疑心)을 불러일으키고, 일본은 이 결과 군비 강화에 착수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행동을 계속한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불가피하게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은 쓸데없이 일본을 화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극동에서의 평화적인 대기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한편 새로운 외상 아래서 로젠은 세르비아 공사에서 일본 공사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바야흐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로젠은 극동 정세의 한복판에 있었다. 1897년 4월 25일 제출된 로젠 의견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미 유지하고 있던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부활시키는 일은 극동의 해군 강국으로서 지니는 우리의 정책의 제1급의 중요성을 띠는 관심사다. 그렇다면 이 지고(至高)한 국가적 이해가 조선군의 조직 구성 실현 때문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5월 26일 로젠에게 하달된 무라비요프 외상의 훈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러시아는 조선의 병합을 희망하지 않으며, 러시아와 땅을 맞대고 있는 국가인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립하는 것만을 원한다. 우리는 일본이 조선에서 상업적 지배권을 지니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조선 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행동 양식에서 일본과의 관계가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구실을 줄 수도 있는 일체의 것들을 회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이상의 관계 강화교섭을 조선 정부와 행하지 않고 군사교관의 증파도 하지 않는다.”

대한제국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국장(國葬)

이런 가운데 조선에서는 고종이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일련의 국가적 행사를 추진했다. 우선 1897년 8월 14일 연호를 광무(光武)로 개원(改元)했다. 10월에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채용했다. 10월 12일 원구단(환구단)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다음날 발표된 고종의 송조문(頌詔文)에는 “독립의 기초를 창건하고 자주의 권리를 행하게 한다.”라는 한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11월 21, 22일에 명성황후의 국장이 거행되었다.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점령과 러시아

1897년 11월 1일 산둥반도의 장자장(張家庄)에 있는 독일 가톨릭교회가 중국인의 습격을 받아 선교사 2명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산둥에는 115개의 교회와 작은 집회소가 있었고 독일인 선교사 66명이 있었는데, 이는 독일 정부의 후원을 받는 특별한 종교 활동이었다. 이것이 중국인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독일 정부는 즉각 이 사건을 자오저우만으로의 함대 파견과 점령의 구실로 이용했다. 니콜라이와 무라비요프 외상은 독일함대의 자오저우만 점령을 묵인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 당시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는 자오저우만에는 관심이 없었고 조선의 항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러·일 신협정을 요구하는 움직임

일본의 여론은 러시아 함선의 뤼순 입항에 반발했지만 정부는 냉정했다. 니시외상과 주러 하야시 다다스 공사는 러시아가 랴오둥반도를 취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보상을 한국에서 취하려고 했다. 러시아와의 사이에 현안으로 되어있는 ‘신협정’을 체결해 거기에 일본의 권익을 일층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98년 2월 16일 하야시 공사는 무라비요프 외상에게 일본의 의정서 골자를 건넸다. [1. 일·러는 한국의 독립을 유지한다. 2. 군사교관은 러시아 정부에 일임한다. 3. 재정 고문은 일본 정부에 일임한다. 4. 상공업상의 이익에 관해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신규 조치를 취할 때 미리 조정한다.]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소극적인 제안이었다. 이 결과 1898년 3월 27일 러시아와 청국은 랴오둥반도의 조차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서울에서는 독립협회의 반러시아 캠페인이 정세를 바꾸어 놓았다. 러시아는 한국 정부와의 특별한 원조 관계는 멈추지만, 조선을 일본에 넘긴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일본도 같은 입장에서 조선을 대할 생각이었다.

니시(외상)-로젠(공사) 의정서

한편 일본 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하려고 했다. 3월 19일 니시 외상은 로젠 공사에게 구상서를 건네면서 일본은 러시아와 함께 한국의 주권과 독립을 확인하고 내정간섭을 하지 않을 것을 약정할 용의가 있었다. “국토의 접근성 및 현재 보유하는 이익을 고려하면 조언 및 조력을 제공하는 의무는 일본에게 일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제안했다. 나아가 “러시아가 이를 인정한다면 일본은 만주 및 그 연안을 전적으로 일본의 이익 및 관계의 범위 밖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만한교환론이었다. 그 결과, 니시-로젠 의정서라 불리는 제3의 협정이 1898년 4월 25일 도쿄에서 조인되었다. [제1조: 일·러 양 제국 정부는 한국의 주권 및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또한 서로 이 나라의 내정상의 모든 것에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한편 한국 내부에서는 독립협회의 개혁 운동과 더불어 보수파 조병식 등이 보부상을 조직해 황국협회를 설립, 독립협회에 대립하고 있어 정치적인 위기를 초래하고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 어느 나라보다도 러시아만이 지고(至高)의 권력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양국의 관계가 강화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헤이그 평화회의

1898년의 뤼순·다롄의 점령에 이어서 러시아는 이듬해 또 하나의 움직임으로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1899년 5월 18일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였다. 이 역시 무라비요프 외상의 생각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실현한 기획 작품이었다. 육군상 쿠로파트킨은 황제가 군사비 증대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헤이그 평화회의에 의제를 상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9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러시아의 황제가 호소한 헤이그 평화회의는 1899년 5월 18일에 헤이그의 숲속의 집 궁전에서 개최되었다. 참가자는 25개국 110명이었다. 여기서 한국의 불참은 외교적 감각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회의는 기존의 국제조약규정을 하나로 정리했을 뿐 아니라, 평화를 확고한 것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제시했다. 바로 이 수단이야말로 러시아가 회의에 제출한 제안에서 지적한 것과 일치한다. 제3자의 중재는 국제분쟁 해결의 최선의 수단이라고 선언됐다. 러시아는 뤼순을 획득함으로써 마침내 태평양 연안에 부동항을 얻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제 조선은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략적으로 보면 이는 최악의 영토 획득이었다. 만주라는 중국 영토의 남단에 있는 항구는 남만주철도와 동청철도를 통해서 러시아와 겨우 연결할 수가 있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가 뤼순을 획득하면서도 여전히 조선의 남단에 거점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장래의 방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지형상으로 보아 ‘우리의 이익선의 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제국의 이익을 유지하고 확충’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베조브라조프의 동아시아회사

한편 러시아에서는 동아시아회사를 설립해서 러시아가 일본에 조선 남부를 넘겨주고 조선 북부는 러시아가 장악하는 ‘조선분할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다시 조선 전토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회사의 목적은 ‘만주를 해양에서 분리하고 조선을 대륙에서 분리하는 러시아의 테두리를 창출한다’였다.

19세기 마지막 해인 1900년 1월, 외상과 육군상은 세기의 전환기에 임해서 대방침에 관한 의견서를 작성했다. 내용 중에서 극동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실은 최근 러시아의 모든 지향점이 극동에서 적당한 부동항을 획득하는 것에 맞추어져 왔다.”라며, “러시아로서는 조선에 관해서는 병합은 필요하지 않지만 일본이 세력을 확립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우리의 보호국으로서 약하고 독립적인 조선이 우리에게는 최선이다. 그러나 지금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조선 시장을 제압하려는 목적을 추구하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일본 측의 정력적인 반격에 직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