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鑑定 그리고 감정感情
공감은 배려의 초석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원하려면
그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마크 시몬스 Mark Simmons
공감은 배려의 초석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원하려면
그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마크 시몬스 Mark Simmons
글.오세범 감정평가사
(가온감정평가법인 본사)
지난 2023년 1월 겨울, ‘○○○○지구 물건조사’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물건조사’란 손실보상업무 진행을 위한 기초 지장물 조사를 말합니다. 사업지 내 토지·건물 및 거주 사항(소유자, 세입자) 등을 조사하며,
조사한 자료들은 손실보상과 이주대책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이전에는 담보 감정평가와 경매 감정평가와 같은 일반적인 감정평가만을 했던 터라 새로운 업무영역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다른 보상지역의 물건조사 내역 등을 꼼꼼히 검토했고, 선배님들로부터 조언도 받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현장조사 시작 1주일 전부터 소유자분들께 연락을 드려 현장조사 약속을 잡았습니다.
새로운 업무 수행이 시작되는 첫날. 설렘과 걱정이 공존했고 1월의 날씨는 생각보다 추웠습니다. 게다가 찬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현수막들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현장조사가 생각보다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몇 분 뒤, 현장에 도착해 소유자를 만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상 밖의 질문이 돌아왔습니다.
“뭐 때문에 오신 거예요?”
당황했습니다. 사전에 전화로 기본적인 설명을 했기 때문에 물건조사에 대한 이유를 알고 계실 거로 생각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다시 설명해 드리기에는 지번마다 약속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조사
시간을 넉넉하게 잡긴 했지만, 첫날이다 보니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영하의 기온과 차가운 바람은 저를 더 얼어붙게 했고, 조사를 빨리 마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결국 형식적인 대답을 내뱉었습니다.
“지장물 조사 나왔고요. 궁금하신 내용은 경기주택도시공사에 전화해 보시면 됩니다.”
그러자 소유자가 소리쳤습니다.
“기본 설명도 없이 조사하는 게 말이 됩니까?”
머리가 얼어붙은 기분이었습니다. ‘분명히 일주일 전에 기본 설명을 해드렸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이곳에 온 목적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다른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보상액은 얼마나 나오나요?”, “언제까지 이사해야 하나요?”, “오늘만 조사받으면 끝인가요?”
돌이켜보면 궁금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의 초점은 그저 일, 물건조사업무에만 맞춰져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감정(感情)을 외면하고, 저의 감정(鑑定)만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시간 관계상
물건조사부터 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조사가 끝나면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다행히 조사는 순조롭게 끝났고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소유자의 고향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삶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소유자의 거주지가 공익사업에 편입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나이가 있다 보니 집으로 오는 공문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인터넷에 익숙하지 못해 정보 검색마저 어려웠다고 합니다. 공익사업 발표와 동시에 부동산 가격이 날마다 뛰어 마음도 답답했다고 했습니다. 몇 달 뒤면 타 지역으로 이사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억지로
떠나야 하는 상실감, 이곳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 터를 잡아야 하는 두려움, 그의 감정(感情)은 복잡함과 서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너무 감정(鑑定)에만 쏠려 있던 것입니다.
물건조사를 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무작정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 욕을 섞는 사람, 가만히 뒤에서 쳐다만 보는 사람···. 하지만 이들에게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몇 개월 뒤, 그들이 생활하던 공간을
떠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어릴 적 이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설렘도 있었지만, 정든 곳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이사는 필요에 의한 결정이지만 이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를 생각해 보니 이분들의
감정(感情)이 조금이나마 느껴졌습니다. 강제로 이주해야 하는 그 마음을 말입니다. 물론 재산권에 대한 손실보상금은 지급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감정(感情)은 감정(鑑定)평가를 통한 보상금액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소유자가 따뜻한 커피음료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도 애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괜스레 민망했습니다. 그저 몇 분 동안의 짧은 대화였지만, 소유자분은 쌓여있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장물 조사가 단순하게 목록을 작성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물이 물건조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유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면 더 순조롭게 마무리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단순히 감정(鑑定)을 통해 결과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감정(感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국감정평가사협회 「윤리규정」 제1장(윤리강령)에 따르면, “감정평가사는 전문가로서 자긍심을 갖고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하여 사회공헌에 앞장선다.”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손실보상 감정평가업무는 국민과 가장
밀접하게 마주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감정평가사의 역량에 따라 공공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역량에는 업무능력도 있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도 포함됩니다.
영국의 작가 마크 시몬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공감은 배려의 초석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원하려면
그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이 말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배려, 타인에 대한 공감. 결국 감정(感情)이었습니다.
감정평가사는 업무 특성상 많은 사람을 마주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설명하고 설득하며 공감하는 과정이 늘 함께합니다.
작년 겨울, 처음 만난 소유자를 통해 배웠습니다.
‘서로 간에 감정(感情)을 존중한다면, 좀 더 나은 감정(鑑定)평가가 되지 않을까’라는 깨달음을 말입니다. 이런 감정(感情)과 감정(鑑定)들이 한데 모이는 상상을 해봅니다. 감정평가사의 자긍심과 사회적인 역할이 보다
높아지는 순간이 그려집니다.
복귀하는 길에 현수막을 다시 만났습니다. 내용은 그대로인데 새로운 감정(感情)이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