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감정평가사 수기 공모전」 장려상 작품

강산을 품은 인생

글.김종식 감정평가사

卒壽(졸수, 90세)를 앞두고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니, 우리 강산을 디디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달려왔음에 뭉클함이 밀려온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웅장한 대청댐을 돌아보며, 드넓은 영종도의 간척지, 혹은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하는 여러 시골 마을을 방문할 때면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나의 무용담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감정평가사라는 자랑스러운 직업을 통해 수많은 이들의 삶을 공감하면서도, 사회의 공적 개발에 기여하는 ‘일꾼’으로서 공정과 정직의 직업윤리로 스스로를 다스리지 않았다면 미완성 스토리로 남았으리라.

원래 토지평가사로 명명됐던 이 길을 택한 것은 그 길이 새로운 도전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경북 상주의 시골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했던 나는 사과 상자 두 개로 신혼을 차렸지만, ‘신진자동차 공업주식 회사(이후 대우자동차로 변경)’에 자리 잡으면서 경리과장으로서 안정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이 넘치던 한국 사회에서 나는 태동기의 부동산 경제학이 큰 역할을 하리라 믿고, 퇴근 후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부동산학을 전공으로 공부했다. 1973년 2월 졸업하던 시기에 마침 최초의 국가 공인 토지평가사 시험이 생겼고, 이에 응시하여서 합격하게 되었다. 주경야독의 결과로 얻은 ‘합격번호 79번’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시험이 주는 의미는 내 개인의 성취를 넘어 인생의 큰 의미로 남아 있다. 각자의 일을 하면서도 함께 모여 밤새워 공부했던 동료들은, 감정평가업계에서 개척자 정신으로 전진하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때로는 선의의 경쟁으로 성장했다. 이런 과정이 오늘의 감정평가사업계의 틀과 네트워크를 이루어 냈다고 자부한다. 또한 좁은 방에서 숙식하며 공부했던 스터디 그룹에 불평 한마디 없이 밥 해 주고 애 써준 내 평생의 후원자, 아내에게 다시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흘린 땀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아내의 희생과 격려 없이는 그 합격증은 내 것이 아니었을 터이다.

30대 중반의 패기 있는 토지평가사로서 나는 쉬지 않고 주어지는 현장 업무를 위해 어디든 달려갔다. 생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국토개발의 ‘미션’을 띤 특공대의 마인드로 일을 했던 것 같다. 당시에 나는 이 사명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특권과 봉사라고 여겼다. 1973년 국토개조사업은 전국 토지개발 계획 속에 항만, 공단 개발, 지방도로 건설을 종합적으로 추진하고 있었고, 지방의 개발은 새마을사업을 통해 본격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토지와 건물의 정확한 평가와 공정한 보상을 가능하게 할 제도가 정비되어야 했고, 나는 그런 목적에 충실히 하고자 했다. 미국에서 먼저 시행돼 일본에서 받아들인 이 제도는 어찌 보면 임의적이고 불공정한 토지수용을 막는 한국의 경제개발 과정의 제도화를 상징했기 때문에 나의 자부심은 자못 국민 복리를 위한 ‘공적 신복(公的 臣服)’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초기 토지개발 과정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강제 수용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수많은 법적 문제와 얽히기도 다반사였다. 동시에 토지의 용도를 기술적,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행정적 난관은 복잡한 방정식 이상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관례나 사례가 전무했던 감정평가사 1세대로서, 많은 다른 국가의 국토개발 사례를 공부하려 영문 원서까지 사전을 붙들고 때론 민법 전서를 뒤지고 부동산 경제학 서적을 파며 고시생처럼 공부했다.

동시에 폭발적인 국토개발 계획으로 인해 다양한 매수 수용 건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토지 감정평가업무에 전념했다.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나는 한 번에 여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가방에 많은 의뢰 공문을 담고 전국을 누볐다. 한번 출장 시 약 3개월 정도는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곳곳에서 감정평가업무를 수행할 때면, 한창 재롱을 부릴 아들, 딸이 어른거렸고, 내게는 새 에너지를 부어주는 위로와 희망의 영양제가 됐다.

한편, 밤에 현장을 누비다 겪는 에피소드는 감정평가사 직업의 부록과 같았다. 밤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경찰이 나타나 간첩 신고가 들어왔다고 신분 확인을 하기도 하고, 댐 건설로 평생을 살던 마을을 떠나야 하는 할머니의 눈물에는 안타까움을 나누기도 했다. 또한 보상액을 조금이라도 더 받겠다고 하는 이들을 능수능란하게 대처해야 하는 법도, 어떻게 알았는지 집에까지 그 당시에 귀한 바나나 한 상자를 들고 와 은근히 청탁하는 사업가에 호통치던 결기는 교과서에는 없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책임감으로 얻어졌던 것 같다.

희소한 직업이었던 토지평가사로 시작하여 지낸 50년의 세월을 추억함은 내 개인의 기억뿐이 아니다. 많은 이들과의 인생사를 담은 소통, 재산의 보상 감정평가에 관련된 사회적 이해 충돌, 국가의 공적 개발이 날줄 씨줄로 엮여서 이루어진 결정체이다.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차관 도로, 여러 국도, 지방도로, 시골의 새마을 도로와 같은 도로개발 및 확장 사업은 나라의 혈관같이 뻗어갔다. 동시에 개발에 균형을 맞추어 환경 보존과 관광을 위한 설악산, 지리산 등 국립공원의 사업은 개발과 자연의 균형을 여는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삶의 풍요를 위한 경제구조 개혁은 각 지역의 공단 및 항구 개발, 연구단지 등을 통해 구현됐다. 또한 국토균형발전 계획은 댐 건설 등 각 지방 강 개발을 통해 수해 방지와 안정적 물 관리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강 개발로 이어졌다. 주민을 위한 발전은 개별 도시의 재개발사업과 새로운 도시조성사업, 그리고 제주 국제공항과 같은 대규모 투자로 성과를 내었다. 사회적 발전은 지방자치단체를 튼튼하게 하여 도청, 시청, 군청 등의 행정시설을 이전하는 것으로 연결됐다.

이렇게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전 영역에 걸쳤던 내 발걸음을 돌아보니 스스로 놀랍다. 감정평가사로서 내가 애써 만든 감정평가서 하나하나가 이 모든 국토사업과 경제개발에 초석으로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지의 길을 내디뎠던 나의 도전이 참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80대 중반이 넘은 내가 최근까지도 감사(監事)의 직을 맡아 쌓아온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까다로운 법적 케이스에 활용할 수 있었다는 현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걸어온 길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일까. 나의 감정평가사로서의 50년은 한낱 직업인으로서 축적된 개인의 시간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지경을 넓히는 일에 일조한 자긍심으로 수 놓아진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