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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와 산초처럼 떠난
스페인 여행기
글. 전성호 감정평가사(하나감정평가법인 대전충청지사)
1일 차(떠남)
아들과 나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나라 ‘스페인’과 유럽경제의 중심지 ‘독일’로 첫 유럽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2020년 1월 17일부터
1월 28일까지 11일간의 자유여행을 위해 여행 도시, 항공, 숙박 등을 선택하고 투어 루트를 계획했다.
우리의 여정은 1월 17일 오전 7시 15분 대전에서 출발하는 인천공항행 버스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10시간의 비행 후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밤 11시경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국적인 노래를 들으니 여행지에 온 걸 실감했다.
2일 차(마드리드)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다. 시차 적응이 덜 되어 잠을 거의 못 잤지만, 세계 3대 미술관(파리 루브르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중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에 간다는 설렘을 안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 왕조가 오랜 기간 수집한 작품들이 1868년 국유화되며 오늘날의 명칭인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1819년 개관 당시에는 311점의 작품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무려 8,000점의 회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대부분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유럽 회화사,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 회화사에서 중요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내게도 감동의 물결이 밀려와 무려 다섯 시간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작품 감상에 빠져들었다. 특히 소장품 중에서도 중세 후반 및
근대의 기독교와 관련된 성화들이 많아 큰 감동을 했다. 수많은 화가 중에서도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은 유난히 머리와 가슴에 깊이 남았다.
미술관에서 나온 우리는 마드리드 시내를 따라 걸었고 솔 광장을 지나 마요르 광장으로 향했다. 솔 광장에서 마요르 광장에 이르는 스페인 구시가지는 아름다운 중세의 건축물과 현대적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북적이는 현지인들 사이로 마드리드의 매력이 느껴졌다.
물론 보슬비도 내리고 잔돌 형태의 보도블록 때문에 걷기가 쉽지 않았지만, 구시가지를 지나며 마드리드의 풍경을 감상하고 산미겔 전통시장에서 거리 음식도 맛보며 마드리드에서의 아쉬운 첫 날을 마무리했다.
3일 차(세비야 1일 차)
충분한 수면 덕분에 시차 적응이 어려워 쌓였던 피곤이 꽤 풀렸다.
여유롭게 조식을 즐긴 후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세비야로 떠나기 위해 마드리드 중앙역인 아토차역으로 향했다.
우리는 11시 세비야행 고속열차(Renfe)에 탑승해 3시간의 이동 후 세비야 산타 주스타역에 내렸다.
대륙성기후인 마드리드에 비해 지중해성 기후로 일 년 중 300일이 쾌청하다는 세비야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바람과
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스페인 광장이 보이는 뷰가 멋진 호텔방에 여장을 풀고, 곧바로 세비야 시내 관광에 나섰다.
중세의 도심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건물들과 미로같이 얽혀있는 골목길을 걸으며 세비야의 참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한참을 길 잃은 듯 골목을 걷다 보니 눈앞에 커다란 성당이 나타났다. 세비야 대성당이었다.
세계 3대 대성당(로마 바티칸 대성당,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중 하나인 세비야 대성당은 그 외관부터가 어마어마했다.
중세 고딕 양식을 기본으로 르네상스, 바로크양식이 혼재된 형태의 건축물이라고 한다. 내부에서 본 세
비야 성당은 고딕 양식의 건축물답게 아치가 교차하며 하늘로 높게 뻗어 있었고, 공중에서 보았을 때는 건물 전체가 십자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여행에서 아는 만큼 보이니 공부가 필수지만, 시간에 쫓기는 관계로 현지에서라도 최선을 다해 배우려고 오디오 투어를 신청했다.
아쉽게도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없어 영어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내부를 관람했다.
성당의 성화와 성구들은 모두 문화적, 종교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신대륙 발견자인 콜럼버스의 유해가 안치된 공간을 보면서 유럽의 성당은 성인이나 선각자의 유해를 안치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당 내부의 종탑인 히랄다탑에 올라 세비야의 아름다운 거리를 한눈에 조망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여유 있게 저녁을 먹고 예약한 세비야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러 갔다.
구시가지의 골목 안에 있는 공연장에는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3명의 무희(남자1, 여자2)와 2명의 가수(남자1, 여자1), 1명의 기타리스트가 팀을 이뤄 약 1시간 정도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플라멩코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공연으로 집시들(인도에서 이주해온 아리아인들로 유럽의 떠돌이 민족 집단)의 한을 노래와 기타에 맞춰 춤으로 표현한 행위예술이다. 세비야에서 대표적인 공연 팀이라 그런지 음악도, 춤도 관중들의 마음을 바로 사로잡았다. 우리는 공연과 함께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4일 차(세비야 2일 차)
이른 아침 날이 밝자 호텔 앞 스페인 광장을 둘러보기 위해 혼자 잠자리를 정리하고 나왔다. 아침의 맑은 공기를 깊이 호흡하며 광장에 들어서자 광장 한가운데 조성된 분수대와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스페인풍의 건축물에 시선이 뺏겼다. 광장을 가로질러 걷다 보니, 잘 조성된 식물원 같은 공원이 보였다. 숲 사이로 마련된 산책로를 걸으며 나무들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이 호흡했다. 새 소리도 정겨웠다. 숙소로 돌아와 아들과 함께 브런치를 먹고, 여유로운 세비야 시내 투어(세비야 대학, 황금의 탑, 유대인 거주지역등)를 마친 후, 다음 목적지인 그라나다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5일 차(그라나다 1일 차)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알함브라 궁전으로 출발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지맥인 몬세라트산 중·하단부에 위치한 알함브라 궁전은
유럽에 현존하는 이슬람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궁전은 13세기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자르 왕조시대에
건축되어, 1492년 국토회복 운동 때 가톨릭 왕이 정복 후 문화유산으로 보존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곳은 크게 4개의 관람 구역으로 나뉜다.
헤네랄 리페(general life)로 불리는 왕실의 여름 별궁과 정원이 있는 공간과 성곽으로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알카사바,
카를로스 5세 궁전, 그리고 이슬람 건축의 백미 나스르 궁전이다.
우리는 숙소인 파라도르에 도착 후 숙소 뒤편의 헤네랄 리페를 둘러보았다.
관대함과 영원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로 잘 정돈된 정원수와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끌어 조성한 분수정원은 왕실의 정원이라는 격에 맞는 아름다운 자태였다. 그 정원의 길을 “알함브라의 추억”의 은은한 음악을 들으며 걷노라면 14세기 당시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파라도르에서의 여유 있는 점심식사 후, 알함브라의 많은 전설과 민담을 머금은 나스르 궁전과 알카사바 성곽을 둘러봤다.
나스르 궁전에는 당시 7개의 작은 궁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메수아르 궁전, 코마레스 궁전, 라이온 궁전만이 남아 있다. 몇 년전 터키의 이스탄불 여행에서 본 궁전들과 비교하면 화려함에서는 다소 뒤지더라도 크기와 구성면에서 앞선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카사바(성곽)에 올라 이 성곽의 망루 중 하나인 라벨라 탑에 서니 그라나다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묵은 숙소인 파라도르(국가 지정 숙소)는 카를로스 5세 궁전 우측에 위치하는데, 이 파라도르는 중세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며 수도원 운동을 일으킨 성인 프란체스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탁발수도원을 개조한 곳으로 유서 깊은 건축물이었다. 성인 프란체스카의 흔적이 숙소 내 곳곳에 동상과 성화 등으로 기념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대부호 아들이었지만, 청빈의 삶을 살아 작은 예수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추앙받는 성인 아시시의 프란체스카.
내가 머문 숙소가 성스러운 분을 기리는 숙소였다는 걸 알게 되니, 크리스천으로서의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에게도 예수 향기가 있었던가?
6일 차(그라나다 2일 차)
그라나다의 누에바 광장을 중심으로 북쪽 몬세라트산에는 3개의 큰 언덕(구릉)이 있는데, 제일 크고 높은 오른쪽 언덕에는 알함브라 궁전이 위치하고, 왼쪽 언덕에는 당시 귀족과 서민들의 주거 구역인 알바이신 지구가, 중간 부분에 위치한 언덕에는 집시들이 거주하는 사크로몬테가 위치한다.
나는 이른 아침 숙소를 떠나 집시들이 언덕을 깎아 토굴에 집을 마련해 살았던 모습이 잘 보존된 사크로몬테 지구를 둘러보고,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운 자태가 한눈에 들어오는 알바이신 지구의 니콜라스 전망대에도 올랐다. 때마침, 전망대 공터에서는 집시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무언가 한이 담긴 듯하면서도 힘찬 목소리에서 터져 나오는 노랫소리가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한 국가의 구성원인 왕족이 살던 궁전과 귀족과 평민의 주거지역 그리고 하층민에 속했던 집시들의 주거지역을 둘러보며, 사람의 삶은 어느 정도 공간과 집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로운 브런치 식사 후 다음 일정을 위해 그라나다 공항에서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를 타고 바르셀로나 도착 후, 지중해에 연접한 시내 바닷가 쪽의 숙소에 체크인하며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7일차(바르셀로나 1일차)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투어 중 하나인 ‘가우디 건축 투어’를 위해 만남 장소인 카사 바트요로 향했다. 오전 8시 30분부터 시작된 투어는 시내 중심가인 그라시아 거리에 있는 카사 바트요에서 시작되었다. 그라시아 거리는 바르셀로나의 최고 번화가답게 도로변은 여러 명품 가게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유럽의 최대 쇼핑 장소 중 하나라고 했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는 이곳에 두 채의 유명한 집, 카사 바트요와 카사 밀라를 지었다.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여겨졌던 꽃의 건축가 루이스 도메네크 아몬타네르의 건물 카사 레오 이 모레라, 조셉 푸치의 카사 아마트예르와 같은 블록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1905년 당시 바르셀로나 정부가 뽑은 올해의 건축은 ‘카사 레오 이모레라’, 2위는 ‘카사 아마트예르’, 가우디의 건축은 3위에 그쳤으며, 사람들은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를 두고 ‘뼈로 만든 집’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을 모티브로 삼은 카사 바트요는 시대를 한참 앞서나간 건축물이었고, 내부에는 거주자를 위한 가우디의 세심한 배려가 많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섬세한 건축기법과 바르셀로나 전설을 모티브로 삼아 완성된 카사 바트요는 건축물이라기보다도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카사 밀라는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를 지켜본 사업가 밀라가 가우디에게 의뢰해 지어진 건물이다. 카사 밀라는 바르셀로나 근교의 몬세라트산과 지중해변 바닷가 모래사장을 형상화해서 만든 건축물로 건물은 모두 파도치듯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도 모양의 옥상정원에는 마치 투구를 쓴 것 같은 모양의 독특한 탑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스타워즈 다스베이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건물 내부에 엘리베이터와 전자식 개폐 장치를 설치하는 등 당시로써 첨단 기능까지 갖춘 건축물이었다. 가우디는 건물 옥상부에 3D 십자가와 성모를 상징하는 M 이니셜과 장미를 새겨넣어 그의 신앙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카사 밀라 또한 ‘채석장’, ‘벌집’, ‘고기 파이로’ 불리며 많은 대중의 조롱을 받았고, 애초 부자들의 주거공간으로 카사 밀라를 활용하려던 밀라씨는 가우디와 사이가 나빠져 사례금 문제로 소송까지 갔다고 한다. 이후 가우디는 카사 밀라를 마지막으로 인간을 위한 집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카사 밀라 이후 성당 건축을 의뢰받게 된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2대 건축가로 일하게 되는데,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는 이후 1926년, 75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할 때까지 43년간 이 건축물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건물의 외관은 크게 동편 탄생의 파사드와 서편 수난의 파사드, 남쪽 영광의 파사드로 나뉘는데, 예수의 탄생부터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성경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구라도 외부에서 이 성당을 보았을 때 복음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려주려는 가우디의 목적이었다.
탄생의 파사드에는 예수, 요셉, 마리아 세 사람(성 가족)을 주제로 여러 조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정면에는 예수의 탄생을, 왼편은 요셉을 테마로, 오른편은 마리아를 테마로 여러 조각을 볼 수 있다. 수난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주제를 정했지만, 가우디 사후 호세 마리아 수비라치라는 후배 건축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예수가 배신당하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의 부활이 표현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면 외부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가우디는 자연을 소재로 성당 내부를 건축하였는데 기둥들은 마치 숲속의 나무와 같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하늘로 뻗어 나가고 있었고, 천장 건축 또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미적인 도형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물답게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 또한 아름다웠다.
탄생의 파사드가 위치한 동쪽 창은 희망의 색인 파란색으로, 수난의 파사드인 서쪽 창은 죽음의 의미를 나타내는 주황색 계통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이용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빛의 방향과 질량에 따라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서 성스러운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가우디의 의도에 따라 내부에는 조각물이 거의 없었는데, 이는 성당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게 묵상의 공간, 신을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미완성인 영광의 파사드의 출입문에는 히브리어의 주기도문이 적혀있었는데, 세계의 모든 언어로도 함께 적혀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한글로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가 함께 적혀있었다.
가우디는 탄생의 파사드와 지하예배당을 완성할 즈음에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이 건축물이 완성하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후대 사람들에게 성당을 완성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후대 건축가들에 의해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건축되고 있다.
이 성당의 지하예배당에 그의 시신이 안치되던 날, 온 바르셀로나가 애도 물결로 넘쳐났다고 한다. 2026년, 143여 년에 걸친 대장정이 끝나는 날. 다시 한번 세계가 장엄한 성당의 모습과 함께 가우디가 그토록 바랐던 복음의 물결로 넘쳐날 것이 상상된다.
사업가 구엘이 있었기에 건축가 가우디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둘의 이야기도 매우 인상 깊었다. 재물이 예술을 위해 쓰일 때, 그 돈의 가치는 단순한 물질의 차원을 넘어선다. 구엘의 재력이 가우디를 통해 쓰였을 때 그것이 건축의 도시 바르셀로나와 훗날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주춧돌이 되고, 오늘날 가우디가 기억될 때 구엘도 함께 기억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8일차(바로셀로나2)
이날은 피카소 미술관에 들러 천재 화가 피카소의 작품을 둘러봤다. 말라가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바르셀로나로 이사 온 그는 이미 15세에 거장 라파엘로의 수준에 도달하는 천재성으로 스페인을 놀라게 했다. 실제 그의 유년 시절의 그림은 미술 거장들의 그림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후 피카소는 19세에 파리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 고갱, 고흐 등의 그림을 접하며 영향을 받았고, 그의 화풍도 끊임없이 진화하여 입체주의 미술을 창안하게 되고, 이후에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 미술로 발전하였다.
미술에 조예가 얕은 나의 눈에 그의 후기 추상화는 난해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유년기의 그림을 보며 기존의 규칙을 파괴하려면 먼저기본을 완벽히 익혀야 한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오후에는 보른 지구의 수공업 가게들을 둘러본 후, 지중해의 서쪽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의 저녁 식사로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
9일차(마무리)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아침으로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츄러스 가게에서 츄러스와 초콜릿 커피를 맛보았다. 약 8일간의 스페인 여행을 되돌아보며 독일로 떠났다. 이번 스페인 여행은 하루 평균 15,000보, 약 11Km 정도 매일 걸으며 가고 싶은 곳을 모두 찾아다니는 여행이었기에 그 기억이 더욱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