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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코스 마라톤(42.195km)첫 완주기 정 열 우 | 미래감정평가법인 감정평가사 초조한 기다림 2000년 3월 19일 5시 기상, 초조하게 아파트창문을 열고 조심스레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손에 무엇이 묻는 감촉이 있는지 온갖 신경을 기울인다. 전날 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것이라 했었는데 기상대 직원들의 명예를 위함인지 이미 아스팔트 바닥은 촉촉이 젖어있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하늘은 진회색 차일이 낮게 드리워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아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긴 가뭄으로 전국에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상태라 산불발생이 연일 보도되고, 도서지방에서는 식수난이 심각하다 하며, 농작물에도 피해가 크다 하지만, 제발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평소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도 했지만, 오늘만은 일기예보가 틀렸으면. 비가 올 것이라면 오후 2시 이후에나 왔으면. 그런데 일기예보는 오전까지 비가 오다가 오후부터 갠다고 했다. 무엇이든 이렇게도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을까. 5시 반에 간단한 아침식사. 평소 과식하는 습관이 있어 욕구를 억제하기 위하여 미리 내가 먹을 만큼만 내어놓고 나머지는 아내에게 치우라 했다. 아침식사란 것이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내가 짠 특별한 식단인데 바나나 2개, 인절미 7개, 초컬릿 1조각 그리고 오렌지 쥬스 한잔이 전부. 평소 같으면 5분도 걸리지 않을 소량이지만, 조금씩 천천히 오래 씹어 식사시간은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8시에 바나나 한 개와 초컬릿 한 조각을 추가로 먹는다. 이후에는 10시까지 30분 간격으로 물 4분의 1잔씩만. 광화문을 향해 집(나는 대전에 거주하고 친척집임)을 나서기까지는 2시간 정도가 남았는데 몹시 초조하고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감싼다. 책을 들여다봐도 머리에는 커녕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 마라톤만을 생각하자. 양말을 뒤집어 실밥 한올 한올을 손으로 살살 문질러 가며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삐어져 나온 것이 있나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다음은 팬티-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뒤집어 이리저리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튀어나온 실이 있으면 머리깎는 가위로 조심스럽게 손질한다. 만약 무슨 부스러기라도 있어 살갗이 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다음 준비는 왼쪽 팔뚝에 5㎞마다 목표시간을 유성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정성스레 적어놓았다. 5㎞-10시 24분, 10㎞-10시 48분, 15㎞-11시 12분, 20㎞-11시 36분, 25㎞-12시, 30㎞-12시 26분, 35㎞-12시 52분, 40㎞-1시 18분, 이는 초반 오버페이스를 방지하기 위함이며, 결승선까지는 3시간 30분이 소요되는 1시 30분이 목표다. 광화문을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지상의 날씨가 몹시 궁금하다. 만일 비가 온다면 끝인데. 이토록 날씨에 신경을 써 본 적도 없었다. 천만다행히도 이날 날씨는 마라톤을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이었다. 달리는 동안 8∼10도씨 정도로 춥지도 덥지도 않고, 햇빛도 없었고, 비도 도지 않고. 세포의 원초성을 일깨우며 타-앙, 하는 총성과 더불어 뛰어나갈 때의 그 두근거리는 박동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할 수 없다. 완주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는 박동이 쿵쾅쿵쾅 귀를 울리지만, 다리는 어느새 묵묵히 앞을 향해 달리고 있다. 도로의 주인은 차가 아니라 달리는 사람들이
된다. 그들은 이 세상에 더 이상 불평이나 농담 따위를 하지 않고, 각자의 침묵 속에 잠긴다. 조용한 세상이다. 발자국소리와 입으로
치며오는 가쁜 숨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는 조용한 세상이다. 간혹 인도에서 응원하는 시민들의 박수소리가 크게 들린다. 거기에는 승리와
패배 따위의 구분은 없다. 모두에 평등한 원시의 순간이다. "천천히. 천천히. '롱 스트라이드 주법'은 절대 금물. 잰 걸음인 '쇼트 트로팅'주법으로 달려야 한다." 앞으로 튀어 나가는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자신을 진정시키느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다. 특히 너무 큰 보폭은 무릎을 무자비하게 쾅쾅 찧게 하지 않는가? 목적지는 10㎞나 하프지점이 아니라 풀코스 잠실운동장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자꾸만 상기시키려 노력한다. 초반에 오버페이스 했다가는 지난 1년간의 노력과 85명의 '1M1원' 후원자와의 약속도 그리고,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백혈병 어린이들과의 소중한 만남도 다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아뿔싸. 5㎞지점에서 시계를 보니 10시 21분, 10㎞지점에서는 10시 42분이다. 목적지가 10㎞라 할지라도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이다. 초반 오버페이스 하지 않는다고 그토록 신경을 곤두 세웠건만, 다른 사람들의 빠른 속도에 나도 모르게 휩쓸렸구나. 좀더 천천히, 천천히. 시원한 질주 10㎞지점을 조금 지나자 처음으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거리는 1㎞정도로 표고차는 25m랬지? 금년대회도 예년처럼 경주에서 열릴 것으로 믿어 오르막길이 많은 경주코스를 상정하여 충분히 연습해 두었으니 걱정할 바가 아니다. 객기 좀 부려볼까?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발가락에 힘을 모아 힘껏 차 올라간다. 한 사람, 두 사람 20∼30명쯤은 거뜬히 추월한 것 같다. 기분이 좋다. 곧 잠실대교에 다다른다. 강바람이 시원하다. 15㎞지점-11시 5분. 16∼17㎞지점인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근처에 가족들이 응원나온다 했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시계를 보니 11시 12분-그렇지, 11시 20분쯤 통과할 예정이라 했더니 아직 안나온 것이리라-날씨가 몹시 차가우니 아이들 건강을 염려하여 늦게 나와 이미 지나간 것도 모르고 기다리다 결승점인 잠실운동장에도 안가면 어떻게 하지?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心身一體 20㎞지점을 11시 27분에 통과-목표보다 빠르다. 이 정도면 100등 안에 들 것이다. 物我一體 달리기가 하나의 경지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자신의 체중을 느낄 수가 없는, 다시 말해 중력을 초월해 버리는 세계로 들어선다. 황홀한 세계가 그때부터 시작된다. 대지와 우주와 일치된 존재감이 그때부터 느껴진다. 25㎞지점을 목표보다 10분 빠른 11시 50분에, 30㎞지점을 12시 20분에 통과, 발가락 끝부터 손가락 끝까지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는지 세밀히 점검해본다. 아무 이상이 없다. 걱정했던 오른쪽 어깨도 정상이다. 모든 것이 염려했던 것보다 훨씬 좋다. 이 상태라면 3시간 20분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35㎞지점에서 12시 45분-목적지까지 여유있게 목표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겠다. 아니 목표보다 10분 정도 빠른 1시 20분 안에 들어갈 수 있겠다. 고난의 가시밭길 마라톤은 진정 트릭을 허용하지 않는 솔직한 운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솔직할까? 혼자 연습할 때 최고 거리가 35㎞이었다. 혼자 35㎞를 힘들이지 않고 달렸으니 대회에서는 분위기상 풀코스를 여유있게 완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35㎞지점을 통과하자 곧바로 급격히 페이스가 처지기 시작했다. 한계가 온 것인가? 마음은 달리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원스런시밭길 질주가 아니라 힘겨운 고난의 가시밭길. 달리기를 멈추고 걸었다. 걷기도 힘이 든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오른쪽 아랫배가 끊어질 듯이 아픈걸까? 한발자국도 떼기가 어렵다. 차도와 인도경계석에 걸터앉아 머리를 양무릎 사이에 묻고 오른쪽 팔꿈치로 아픈 부위를 지긋이 누르고 한참을 있으니 통증이 가신다. '그래 다시 출발하자'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무릎에 힘이 전혀 없고 아예 일어서지지를 않는다. 다시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고 '여기서 그만둘까? 또다시 출발해볼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아저씨,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교통 통제하던 젊은 경찰관이 걱정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일순간 그리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지만 결승점에서 기다리는 아이들한테 약한 모습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잘들 추월에 나가는데 나만이 지쳐 고통스럽게 걷고 있는 모습이 자신이 보아도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추월해 가는 수 백명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자신에게 화가 난다. 앞으로는 하프코스 이상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아이들의 옹알거림이다. '아이들의 옹알거림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나는 행복하다'고 지난 연말
지인들에게 보낸 연하장에서 말했었다. 1월 12일 9000여명 중에서 1번으로 마라톤 참가신청을 하고, '풀코스도 완주하고 어려운
어린이들도 돕자'는 생각에 신청일로부터 대회당일인 3월 19일까지 백혈병 어린이를 돕는 '1M1원'후원자를 매일 1명씩 모집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회사 동료들에게 이 운동의 취지를 알리고 내가 풀코스를 완주하지 못할 경우에는 반환을 전제로 한 명당 42,199m에
해당하는 42,195원씩의 성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의 적극적 호응으로 대회당일인 3월 19일에는 85명의 후원자로부터
3,600,000원 정도가 입금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 두 다리에는 85명의 성금보다 더 큰 '기대'와 백혈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전해 줄
'희망'이 걸려 있는 터였다. 신비한 오르가즘 예정했던 시간보다 7분이나 늦은 1시 25분에 어렵사리 40㎞를 통과하자 잠실야구장이 보이고,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내 자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발걸음이 가볍고 빨라진다. 참으로 신비하다. 어느 순간 고통이 사라지고, 더 이상 잡생각도 없어지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몸에는 힘이 솟는다. 더 이상 어떤 고통도 분노도 자책도 없어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감이 차
올랐다. 이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의 고통은 환상이며 착각이라는 느낌이다. 아-! 그래서 누군가 마라톤에도
'오르가즘'이 있다고 했구나. 영원히 이렇게 달리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이 순간의 경험은 그전까지 경험했던 어떤 만족감,
행복감보다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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