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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소녀처럼... 신 순 철｜조흥은행 여신심사부 아!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 이젠 퇴근해야지. 달리는 버스, 어두운 차창밖에 한 아줌마가 보인다. 계속 따라오며, 내가 웃으면 같이 웃고, 고개를 돌리면 같이 돌린다, 바보같이.... 지금은 소위 말하는 아줌마가 되었지만, 내게도 풋풋한 소녀시절이 있었다. 하-얀 칼라 풀 먹여 팍 세우고, 가지런한 단발머리, 볼그레한 뺨에 수줍은 미소....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중학교 시절이 마치 르느아르의 풍경화처럼 아름답게 눈앞에 다가오곤 한다. 우리 학교는 전면이 확 트인 들녘으로, 겨울동안 허허롭던 벌판이 모내기가 끝난 봄에는 파릇파릇 희망의 빛깔로, 여름에는 점점 짙푸른 초록의 들판으로, 다시 황금물결로 변해 가는 모습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결실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그런 전원 학교였다. 수업이 끝난 여름날에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가 있었다. 우리 학교 운동장 끝에 있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아래 앉으면 들녘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와 함께 모든 상념을 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아 책을 옆구리에 끼고 그곳을 자주 찾곤 했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교내 스피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곤 했는데, 그 음악에 도취되어 눈을 지긋이 감고 행복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저 음악의 작곡가는 누구며, 주제는 뭐고 하면서 열심히 설명해 주던 친구가 있었다. 나야 듣고 나면 금방 잊어버리곤 했지만. 서울에서 살다 와서인지 하얀 얼굴에 쌍꺼풀진 큰 눈, 왠지 우수를 머금은 듯한 유난히 까맸던 눈동자, 예술제가 되면 어커디온을 둘러메고 나와서 멋지게 연주하던 모습. 말없는 성격 때문에 주위에 친구가 없어서 쓸쓸해 보이기도 했던가. 내가 소녀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친구 종우는 중학교 3학년에 한 반이 되면서 만났다. 그 당시 내 주위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등 악기를 배우는 게 아주 드문 일이었으므로 나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녀가 몹시도 부러웠는데, 그 친구는 수학을 잘 하는 내가 부러웠다나, 어쨌든 우리는 점점 더 친한 친구가 되어갔다. 계절은 바뀌어 하늘이 유난히도 높고 푸르던 가을날, 친구를 집에 초대했다.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으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던 낡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너무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힘들 때면 위안이 되어주는 아빠를 소개한댄다. 얼른 보기에도 내 친구와 너무 닮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우수의 의미가 그 때문이었을까? 그리운 사람을 못 만난다는 것은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니까. 어는 사이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우정이 배인 그 아름다운 교정을 떠나기가 마냥 섭섭했지만, 그녀는 서울로, 나는 대전으로 각자의 길을 가야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헤어지는 게 섭섭하다고, 자주 편지나 하자고 내가 먼저 말한 것 같은데, 몇 개월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뜻밖에도 그녀한테 한방 먹었다. 담임 선생님이 불러서 교무실로 갔더니 남자친구 사귄다고 야단치시는 게 아닌가? 남자 같은 이름인데다가 힘있게 내려쓰는 남자다운 글씨체, '그 동안 잘 있었소? 나도 염려 덕분에 잘 있었다오...'로 시작하는 문장(학생선도라는 명분 하에 학생의 편지를 선생님 임의로 개봉할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다음날, 졸업앨범을 보여드리고 겨우 오해는 풀었지만, 누명이라는 실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내 친구도 고의는 아니었다. 일종의 그녀만의 재치였다고나 할까. 가끔은 주고받던 편지가 입시생이 되고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반송되고, 나도 이사를 하면서 우린 연락이 아주 두절되고 말았다. 얼마 전, 우리 딸이 '아이 러브 스쿨'에서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즐거워 하길래 나도 한번 접속해 보았다. 요즘 20대 30대 사이에서 인터넷을 통해 동창생 찾는 것이 대유행이라는데, 나도 유행에 편승한 것이다. 하지만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찾을 수가 없는지라, 내친김에 사람 찾는 용역회사에 의뢰해서 드디어 찾았다! 그렇게 오랜 동안 마음속에 한 자락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 차를 타면 10분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다니...아마 이 친구가 남자였다면, 진작에 찾았을까? 아니면 영영 안 찾았을까? 잘 모르겠다. 지난날의 발자국과 그 곁에 나란히 찍힌 다른 이의 발자국을 찾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회귀라고 누가 그랬던가. 북한산 자락 밑(구기동)에 사는 그녀는 북한산을 좋아한다면서 아주 오랜만의 만남인데, 이왕이면 자연 속에서 만나자고 했다. 24년만에 보는 그녀는 소녀시절의 솜털 송송 애송이 소녀에서 이젠 성숙한 여인이 되어 나타났다. 큰 눈에 까만 눈동자,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는 여전했다. 예전에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고 음대에 가서 작곡 공부를 하고 싶다던 친구는 뜻밖에도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엄마의 권유를 존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둘째아들이 그녀를 닮았는지 음악을 좋아하고 또 소질을 보여 각종 연주대회에서 큰상을 곧잘 타오는 그녀의 꿈나무가 되어 있었다. 약수터에 다다랐을 때, 여학생들이 귀엽게 웃으며 바가지를 건네준다. 너무 예쁘다. 나도 친구에게 상큼한(?) 미소를 날려보낸다. 친구야, 우리 비록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머리카락에는 고뇌의 흔적이, 몸매에는 희생의 흔적이 묻어 있을지라도, 우리가 꾸었던 꿈을 이젠 아이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전철에서 빈자리나 탐하는 그런 아줌마 말고, 내 가족만 생각하는 가족이기주의자 그런 아줌마도 말고, 우리 이웃의 아픔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항상 소녀처럼 맑고 밝고 순수하게, 우리 예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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