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

Vol.147 FALL 2022

KAPA 인사이드 제2회 감정평가사 수기 공모전 우수상作 ②

공시지가 이야기

글. 홍태의 감정평가사(가온감정평가법인 강원지사)

“공시지가 하세요?” “ 어느 지역 하세요?”

감정평가사라면 이 질문을 한 번쯤 해보거나 받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시지가 업무는 한 해 동안 계속되며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업무다 보니 공감되는 이야기도 많아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한다.

공시지가는 1년간 계속되며 비슷한 시기에 업무가 진행되어 매년 반복하다 보면 계절의 흐름이 인지되곤 한다.

일은 뜨거웠던 한여름 달콤한 휴가가 끝나고 이제 가을이 오나 할 때쯤 시작이다. 표준지 위치를 도면에 표시하고 현장조사를 위해 루트를 짠다. 일정을 확인하고 함께할 차량을 점검하고 현지에서 숙박도 해야 해서 옷가지와 세면도구도 챙긴다.

현장조사는 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래도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안전이다. 지금은 단수 지역이 많아져 혼자서 조사하는 일이 많다 보니 더욱 신경이 쓰인다. 그동안 차량을 이용했었는데 올해는 힘이 좀 더 들더라도 안전을 위해 자전거를 이용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올봄부터 이를 계획하고 엉덩이에 굳은살이 생겨나기를 기대하며 근무시간 중 틈틈이 자전거를 타 두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이 외곽 한적한 곳에 있고 바로 뒤편으로 하천 변 자전거길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20~30분 정도만 시간을 내어도 7~8km는 탄다. 그 덕에 허벅지가 탄탄해져 건강이 좋아지고 걷기도 수월해졌다.

가을볕은 아직도 한여름과 다름이 없지만, 저녁 붉은 노을이 연하게 퍼지고 해가 짧아지는 걸 느끼면 현장조사를 떠나야 할 때다. 내가 공시업무를 담당한 지역은 해안가와 인근에 농경 지대가 많은 곳이다. 경사가 심한 곳이 거의 없어 자전거로 다녀도 힘들지 않게 이동할 수 있다. 도면을 외워 이동하고 표준지 위치, 주변 환경과 도로 등 특성을 확인한다. 미리 확인한 거래사례들도 함께 보며 지역의 가격수준을 가늠해 본다. 종일 도면과 숫자만 바라보던 삭막함 속에서도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있다. 내리막길에서 느끼는 바다 내음 섞인 시원한 바람이다. 사무실 에어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원함이다. 누렇게 익은 벼들, 따가운 햇볕,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 붉은 노을은 한 폭의 수채화와 같다. 이 풍경은 누구라도 시인을 만들 것 같다.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현장조사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복병을 마주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는데 개가 한 마리 우악스럽게 짖어대면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난 개를 무서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두지 못했다. 줄행랑은 판단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자전거에서 재빠르게 내려 머리를 돌리고 이내 페달을 힘껏 밟았다. 2~3백 미터를 정신없이 내달리니 개 짖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뒤돌아보니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됐다. 개보다 빨리 달렸다는 약간의 승리감도 들었다. 놀란 가슴에 현장조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하며 마을 주변을 빙빙 돌았다. 마을 주민이라도 만나기를 바랐으나 쉬 보이지 않는다. 요즘은 농촌에 사람 보기가 쉽지 않다. 멀리까지 와서 개 한 마리 때문에 조사를 못 한 것에 한참을 분해하고 나서 개 주인이 나타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1차로 현장조사를 마치면 가을의 끝자락이다. 가뜩이나 짧은 가을이 어떻게 지났는지 순식간에 시간이 삭제된 기분이다. 찬 바람이 불면 서리가 내린다. 강원도의 겨울은 일찍 찾아온다. 눈 쌓인 시골길 운전은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눈 오기 전 표준지 교체, 신규 선정을 위한 2차 현장조사를 마쳐야 마음이 편하다.

어느덧 눈의 계절이 찾아온다. 하얀 눈이 주는 푸근함과 사무실 히터의 따스함, 일과 시작 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잠시 만끽하고 나면 본격적인 표준지 가격과의 사투가 시작된다. 거래사례, 평가사례를 용도지역별, 가격 수준별로 정리하며 적정사례를 찾아내고 도면에서 확인하고 표준지 가격을 내고 지우는 수정 작업이 계속된다.

가끔 밖에 나가 먼 산을 바라보며 지친 눈을 달래 보지만 노안이 찾아와 예전만큼 쉬 풀리지 않는다. ‘산멍’을 하고 찬 바람을 쐬고 나면 한결 편하다. 검수 일정이 정해지면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 주말도 반납하고 사무실에 나간다.

그렇게 정신없는 날을 보내다 잠시 여유가 생길 때쯤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있다. 한 해와 작별하는 아쉬움과 새해의 설렘 속에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분주하다. 간간이 들어오는 의견제출 민원에 답변하고 전화도 걸어 설명한다. 개중에 가격 때문에 강력히 항의하는 민원인도 있지만 대부분 수긍하시며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표준지 공시지가 조사·평가 업무가 마무리되고 나면 봄이 곁에 와 있다. 볕은 따스하고 멀리서 아지랑이가 보인다. 잠시 봄기운을 느낄 때쯤 개별공시지가 검증 의뢰 공문이 온다. 검증업무는 시청에서 하는 일이라 현장조사 다닐 때와 달리 멀끔히 차려입고 간다. 아직 찬바람이 익숙한 3월이지만 바닷가라 벌써 나무에 꽃망울이 피어 봄 분위기가 훨씬 더하다. 오랜만에 보는 주무관과 반갑게 안부를 묻고 연초 발령으로 새롭게 바뀐 분이 있어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마련된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매년 되풀이하는 일이지만 오랜만에 마주하니 익숙지 않다. 반나절 정도 헤매고 나서야 속도가 붙는다. 검증업무가 끝나면 봄은 한창이고 여름을 기다리는 마음 급한 젊은 친구들의 반팔 패션도 쉽게 볼 수 있다.

이제 개별지가 의견제출과 이의신청을 받아 민원처리를 하고 나면 7월 1일 자 검증, 의견제출, 이의신청으로 공시지가 업무가 끝이 난다.

되풀이되는 일이 계속되다 보면 싫증이 나겠지만 우리 업무는 내근과 외근이 적절히 섞여 있으니 지루함도 없고 계절이 변해가는 모습도 잘 느낄 수 있어 좋다. 업무 대부분이 공익성이 크다 보니 부담감도 느끼지만 자부심 또한 크다. 그래서 난 나의 일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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