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명부 감정평가사(명문감정평가법인 강원지사)가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책을 요약하여 기고한 글입니다.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한길사 펴낸곳.
토지는 우리 감정평가사의 가장 주된 감정평가 대상이다. 토지 집합체가 모여 도시와 지역이 형성되고 더 나아가 국토가 되는 것이다. 국토의 다른 표현은 ‘영토’이다. 우리가 영토라고 할 때 그것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과 궤를 같이 보면 된다. 다른 국가가 침해·점령할 수 없는 배타적 개념이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우크라이나는 이에 결사항전으로 대응해 지금까지도 치열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다. 러시아의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결코 자유 민주 진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러시아가 왜 그렇게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실체와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의중을 간파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세르히 플로히(Serhii Plokhy)는 1957년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에서 공부를 마치고, 30세 이후 조국을 떠나 캐나다를 거쳐 미국 학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는 하버드 대학 우크라이나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우크라이나에 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우크라이나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기존에 출간된 책도 어느 정도 유용하지만, 깊이와 넓이 면에서 우크라이나 역사를 충실히 서술한 책이 바로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자연은 축복받았지만, 역사는 저주받았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최근의 참혹한 전쟁으로 이 말의 실존적 울림이 더 커진 상황이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서문에서 저자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기저에 깔린 경향과 이것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본 이 책의 핵심과제이다. 나는 역사가 현재에 대한 혜안을 제공함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이 책을 썼다.”라고 말한다.
제1편에서는 우크라이나 고대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Herodotos)에 의하면 그의 명저 <역사(Histories)>에서 언급하기 전까지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은 그리스 문명이 야만적 타자(Alter Ego)를 만나는 본질적인 경계이고, 흑해 북쪽 지역은 야만인들의 땅이며 신들의 놀이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만인의 침입’이라고 불리는 4세기가 시작되고 결국 5세기 후반 야만족(고트족·훈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로마제국은 붕괴됐으며, 이어 바이킹 시대가 8세기 말부터 11세기 후반까지 지속됐다. 이 시기 키이우(후세에 만들어진 용어는 ‘키이우 루스’다.)의 통치자는 올하, 그의 아들 스바토슬라우, 볼로디미르 대공, 야로슬라우 현재로 이어지면서 기독교를 수용하고, 키이우를 진정한 중세국가로 전환함으로써 유럽의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후에 역사가들은 야로슬라우를 ‘유럽의 장인’이라고 불렀다. 그와 혈연관계를 맺은 국가로는 비잔틴제국,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 헝가리, 프랑스 등이다. 키이우 루스는 몽골의 침입을 받고 해체됐다. 이후 누가 키이우 루스 유산의 정통 상속자이고, 누가 키이우의 상속의 열쇠를 쥐고 있는가? 이 논쟁에서 스칸디나비아, 슬라브,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이들은 야로슬라우 현재를 각기 자신들의 중세 지도자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정체성은 키이우로 환원된다.
14세기 말 우크라이나 영토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의해 통합되면서 이 두 국가의 정책 및 관계가 우크라이나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한편 유럽 전역에서 16세기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동쪽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반 뇌제(4세)는 리보니아 전쟁(1558~1583)을 일으켜 서진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우크라이나 지역 공후 중 코스탄틴 오스트로즈키는 16세기 말 거대한 개인 관할(40개의 성(城)과 1,000개의 소도시, 1만 3,000개의 마을)로 된 제국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울러 튀르크인들이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16세기 비잔틴제국을 대신해 서지중해와 흑해 지역의 지배세력이 됐다. 이 지역에서는 노예무역이 경제활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616년 우크라이나 지역에선 코자크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크림반도 해안의 노예무역 중심지인 카파를 공격해 모든 노예를 해방했다.
1648년 봄에는 대반란(Great Revolt)이라고 알려진 코자크 봉기로 황금의 평화는 끝나고 전 지역의 정치지도를 바꾸어 놓았고, 현대 우크라이나의 기본으로 여기는 코자크 국가를 탄생시켰다. 대반란은 코자크 장교였던 소귀족 보흐단 흐멜니츠키 주도하에 타타르와의 동맹을 맺은 코자크는 폴란드 상비군을 궤멸시켰다. 이후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때 농민반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들이었다. 우크라이나 유대인에 대한 공격에서 종교적 동기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유대인 분리 상황에서 종교는 사회 정체성의 핵심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승승장구한 흐멜니츠키는 키이우로 입성했다. 키이우의 대주교, 대학교수, 학생들은 흐멜니츠키를 폴란드의 노예제도에서 루스를 구원한 모세라고 불렀다. 하지만 흐멜니츠키 반란의 국제화 전환점은 1654년 페레야슬라우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주군인 모스크바 공국의 알렉세이 로마노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길고도 복잡한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우크라이나의 통제권을 놓고 계속 진행되는 폴란드-모스크바 공국 싸움에서 코자크가 진영을 바꿀 때마다 코자크는 주권적 요소를 계속 상실했다. 1667년 모스크바 공국과 폴란드 외교관들은 안드루소보 강화조약을 맺어 코자크 우크라이나를 양분했다. 우크라이나 좌안(左岸)은 모스크바 공국이 관리하게 됐고, 우안(右岸)은 폴란드 수중에 떨어졌다.
러시아는 1709년 폴타바 전투로 유럽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중요한 지정학적 변화의 한가운데 있게 됐고, 동시에 그 희생양이자 수혜자가 됐다. 발트해 통제권을 놓고 벌어진 군사적 충돌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결정됐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두 가지 문화적 경계가 있었는데, 하나는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의 경계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경계선이었다. 정치, 사상, 문화의 역사가들은 18세기를 계몽의 시대(Age of Enlightenment)로 본다. 18세기 유럽의 절대주의 통치자들 모두 계몽사상의 제자들이었다. 특히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대표적인 ‘계몽 군주’이다.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1772년 폴란드 1차 분할, 1793년 2차 분할로 이어지고 발트지방, 리투아니아, 서부 벨라루스, 그리고 우크라이나까지 지배하였다. 18세기는 단지 계몽과 이성의 시대만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 시기는 제국의 시대였다. 우크라이나 국가는 “우크라이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폴란드 국가도 “폴란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로 시작하며, 이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두 국가 모두 절멸의 위기였던 18세기 말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1800년대 우크라이나는 나폴레옹 침공군에 맞서 처절하게 싸워 이 시기를 극복하였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의 분위기 속에서 우크라이나의 많은 지성인(근대 우크라이나의 문학 창시자 이반 코틀랴렙스키, 역사학 연구 창시자 미콜라 코스토마로프의 <우크라이나 민족 탄생의 책>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민족의 메시아적 고통을 묘사했다. 타라스 셰브첸코의 첫 시집 <유랑시인>에서 “불쌍한 우리여! 그러나 형제들이여 낙담하지 마라. 우리의 불쌍한 어머니인 우크라이나를 위해 현명하게 일하자”라고 민족혼을 고취시켰다.
또한, 러시아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1848년 합스부르크 제국 내 우크라이나는 최초의 정치조직인 ‘루테니아 최고평의회’를 르비우에 설립했다. 이 정치적 경계선은 19세기에 우크라이나 가톨릭(연합교회)과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가르는 종교적 경계선도 됐다. 1848년 혁명이 새로운 우크라이나 민족 형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우크라이나의 통합은 새로운 민족사상에 의해 태동하고 있었다. 1855년 9월 세바스토플은 러시아에 의해 함락됐다. 세바스토플은 대중적 숭배장소가 되어 러시아 제국의 또 하나의 성지가 됐다. 이와 동시에 모스크바-세바스토플 철도의 개설로 1871년 러시아 제국은 다시 크림반도에 해군의 배치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제국 중심과 연결된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문화적 식민지화를 촉진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흑해 연안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얄타는 제국의 여름 수도가 됐다. 러시아 제국 내에서 남부 우크라이나보다 더 좋은 여건을 갖춘 곳은 없었다.
세계 1차대전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두 발의 총성으로 시작됐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의 일원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시프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저격하였다. 러시아-영국-프랑스의 삼국협상국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의 삼국동맹국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전쟁의 근본 원인은 점점 공세적으로 되어가는 민족주의와 급격히 세력이 약화된 다민족 제국들 사이의 커가는 갈등이었다. 이 전쟁은 군인·민간인 1,8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2,200만 명을 다치게 했다. 우크라이나는 이 전쟁으로 자체 국가를 창설할 기회를 얻은 민족 중 하나였다. 전쟁 시작과 함께 우크라이나 운동가들은 우크라이나 최고 평의회를 구성했다. 1917년 3월 초 키이우에서는 우크라이나 정치, 문화조직 지도자들이 중앙라다(1917~18년 우크라이나 혁명기 의회)라는 통합 조정기구를 만들었다. 1905년 혁명 당시 드니프로 우크라이나의 핵심 인물인 미하일로 흐루셉스키를 중앙라다 수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라다의 젊은 지도자들이 내세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은 중독성 있는 이념으로 판명됐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 쿠데타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 중앙라다는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출범을 선언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제1차 세계대전 전과 같이 두 나라가 아니라 네 나라로 나뉘었다. 우크라이나 서쪽의 이웃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모두 독립국가를 창설한 반면, 우크라이나인은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얻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이 주도하는 국가 안에서 자치 정도만 얻었다. 드니프로 우크라이나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 기간 내내 분열이 지속됐다. 우크라이나 각 지역의 서로 다른 역사적 궤적에 의해 만들어진 지역주의가 큰 장애가 된 것이다.
1922년 우크라이나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간섭으로 독립의 꿈이 깨지고 말았다. 스탈린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하나의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민족 공산주의가 실패한 핵심 이유는 1930년대 소련에서 일어난 극적인 정책 변화 때문이다. 소련 지도부는 영토의 2%를 차지하고, 인구의 20%를 보유한 우크라이나를 산업 재원의 근원이자 투자 대상으로 보았다. 또한, 소련은 우크라이나 농가의 집단화와 정부의 과도한 공납 실행으로 1932년 겨울과 봄 우크라이나에 기아와 대규모 굶주림을 가져와 전체적으로 400만 명 가까운 주민이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사라졌고, 인구가 1/10 이상 줄어들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우크라이나어로 홀로도모르(Holodomor))은 우크라이나와 그 국민에 대해 사전에 의도된 인종학살(Genocide)행위였는가에 대해 2006년 우크라이나 의회는 대기근을 인종학살로 정의했다. 대기근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정치적 논란과 학술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에 의한 제2차 세계대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참혹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유대인이 거주했던 우크라이나는 독일 팽창주의 제1의 목표이자 나치의 주된 희생자가 됐다. 당시 상황은 ‘모든 유대인은 죽어야 했다’라는 말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1943년 11월 6일 소련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으로부터 키이우를 탈환했다. 이후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통합하고자 우크라이나 민족저항군을 섬멸함과 동시에 시베리아 등으로 강제 이주케 하였다. 강제 이주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한참 동안 지속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저항운동을 분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렇게 유럽으로 향한 우크라이나의 문을 걸어 잠갔다. 소련 당국은 우크라이나 저항군을 ‘독일-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라고 칭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독일 파시즘과 끊임없이 연계시켰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UN 창립총회에서 우크라이나는 UN 회원국이 됐다. UN에서 얻은 자리와 고양된 지위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크라이나의 처참한 모습은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 우크라이나는 7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잃었고, 이것은 전체 인구의 15%에 달했다. 우크라이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0년은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고, 충격과 트라우마에 쌓인 사회를 다시 살리는 데 모든 힘을 집중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자, 그 후계자로 흐루쇼프가 수장이 됐다. 흐루쇼프는 다민족 소비에트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공산당 엘리트를 러시아 공산당과 당 수뇌부에서 차출했다. 그리고 페레야슬라우 조약 체결 300주년인 1954년, 전 연방 기념식과 함께 시작됐다. 1954년 1월 크림반도를 러시아 연방 관할에서 우크라이나 관할로 이전한 것은 두 동슬라브족의 ‘영원한 우정’을 기리는 가장 화려한 상징적 조치였다. 이것은 인종적 이유가 아니라 지리적·경제적으로 고려하여 공화국 영토를 확대한 것이다. 크림반도에 거주하는 120만 명의 주민 중 71%는 러시아인이었고, 22%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모스크바의 새로운 지도부와 우크라이나 지도자들 사이의 첫 갈등은 세계 역사상 최악의 기술 사고인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 표면화됐다. 1986년 4월 26일 밤, 4번 원자로 터빈 실험이 잘못되면서 원자로가 폭발한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는 당과 모든 사회계층에서 모스크바와 그 정책에 대한 불만을 크게 증가시켰다. 1986년 6월 우크라이나 작가 동맹 회의에서 이것을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스크바 지배수단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및 ‘글라스노스트’로 정책을 전환했다. 1980년대 말 소련은 때때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나라로 묘사됐다.
1989년은 여러 면에서 우크라이나 정치사의 전환점이 됐다. 대중 정치의 부활, 자유 선거, 가톨릭교회의 합법화 등으로 우크라이나의 정치환경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1990년 여름 우크라이나를 주권국가로 선언했으며, 우크라이나 최고 회의에서 볼히냐 출신의 56세 레오니트 크라프추크를 새 의장으로 뽑았다. 각 공화국에서 독립선언에 놀란 고르바초프가 이를 제재하자, 1990년 10월 2일 키이우, 르비우, 드니프로페트롭스크에서 온 수십 명의 학생이 시내 중심가의 10월 혁명 광장에서 단식투쟁을 했다. 이에 정부가 시위를 해산시키려 하자 5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궐기했고, 결국 총리가 해임됐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학생들과 사회정치의 큰 승리였다. 후에 이를 제1차 마이단 혁명으로 불렀다.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독립을 선언했으며, 1991년 12월 1일 절대적인 찬성 투표로 크라프추크를 초대 대통령(1991~1994)으로 선출했다. 우크라이나의 국기 색은 ‘파랑과 노랑’이었다. 이제 더 모스크바와 키이우 사이의 상징적 연계는 없었다. 제국은 사라지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1990년대 말까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국경 및 영토문제를 해결하고 자체 육군·해군·공군을 창설하며, 유럽의 정치와 경제, 안보기구에 통합될 수 있는 외교적·법적 기초를 확립했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정치적 결합 관계는 1994년 1월 미국이 중재한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물려받은 세계 3위의 핵전력을 포기하는 합의로 시작했다. 또한, 1994년 12월에 체결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서 미국과 러시아, 영국은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했다. 1994년 6월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과 첫 협력 협정 및 NATO와 평화동반자협정을 맺었다. 1997년에는 NATO와 선별적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고 키이우에 NATO 정보센터를 개설했다.
1994년 여름, 크라프추크는 선거를 통해 후임자인 제2대 대통령 레오니트 쿠치마(1994~2005)에게 권력을 평화롭게 넘겼다. 우크라이나가 민주국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지역적 다양성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이전 러시아에서 발전된 모델을 모방하는 경향에서 다원적 사회로 남으면서 다양성이 큰 사회가 됐다. 쿠치마 대통령은 2003년 출간한 책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니다>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쿠치마는 1999년 재선에 성공했지만, 쿠치마 게이트가 대통령직의 독재적 경향 강화의 종지부를 찍으며 우크라이나 정치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2004년 12월 26일 47세의 전 총리 빅토르 유센코가 오렌지 혁명(제2차 마이단 혁명)을 통해 제3대 대통령(2005~2010)이 됐다. 다만 과거 동지였던 율리아 티모셴코와의 경쟁으로 우크라이나 정치는 끝없는 연속극 드라마 같은 혼란이 이어졌고, 개혁과 유럽 통합이라는 목표를 훼손시켰다. 이에 제4대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2010~2014)는 강력한 권위적 정권이었지만, 축재로 인해 시민들이 제3차 마이단 혁명을 일으켜 야누코비치를 탄핵 축출했다.
한편 2000년부터 러시아 정부를 이끌어 온 블라디미르 푸틴은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의 재통합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2013년 우크라이나와 무역전쟁을 시작하고 2014년 2월 초 크림반도를 병합을 검토하여, 2월 26일 크림 자치공화국 의회를 점거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는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고 전선으로 갔다. 정치적으로는 2014년 5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마이단 시위에 적극 참여한 49세의 페트로 포로셴코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4년 5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압도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가 지원하는 세력에 맞서 영웅적으로 도네츠크 공항을 방어한 우크라이나군은 국가에 새로운 신화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 상실, 인구 감소, 러시아에 대한 경제 의존도, 부패 만연, 은행 제도의 문제점, 에너지 부분 개혁의 부진, 부패 스캔들에 휩싸인 포로셴코 대통령과 측근들의 부패 척결 미흡 등으로 국가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2019년 5월 우크라이나 국민은 41세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제6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계속되는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에 지친 국민에게 젤렌스키는 전쟁과 가난, 부패의 종식을 약속했다. 젤렌스키는 여러 기지 면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그는 젊고 야심 찬 개혁가인 ‘청년 튀르크인’과 동맹을 맺었다. 35세의 총리 올렉시 혼차루크가 이끄는 내각은 경제개혁과 부패에 대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우크라이나의 미국, 유럽연합 연대는 완전한 독립국가로서 살아남는 문제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영토 침탈로 훼손된 국제질서를 재건하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됐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침공은 통합된 국가로서 존재의 지속과 국가로서의 독립, 정치제도의 민주적 기초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러시아의 침공은 우크라이나를 언어와 종교, 지역, 인종 경계선을 따라 분열시키기를 획책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사회 대부분은 행정적·정치적 조건(우크라이나의 내부 분열 역사)에서 결합된 다언어, 다문화 민족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국의 장래에 정치적 민족의 존속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파란만장한 자국의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우크라이나 위기는 여러 번에 걸쳐 역사가 이용됐고, 위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에게 정보와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법 위반을 정당화했다.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Conflict)은 그 역사적 뿌리가 깊고, 역사적 선례와 암시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충격과 패배의 모욕, 상실한 영토에 대한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민족 단합을 구축하고, 잠재적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해 왔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가 2022년 12월 7일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정신(The Spirit of Ukraine)’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발발 후 곧바로 기자회견에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지만 나는 대통령으로서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고 했다. 젤렌스키는 결연한 의지로 러시아 침공에 맞선 최고의 전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호소력 있는 연설로 국제사회를 단결시킨 ‘21세기 윈스턴 처칠’로 불린다.
젤렌스키가 지난 3년간 국제무대와 우크라이나에서 했던 수많은 연설 가운데 19개를 추려 담은 항전(抗戰) 연설문집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웅진지식하우스)가 지난 2023년 1월 30일 출간됐다. 우리는 지도자의 비통함이 절절하게 담긴 메시지를 접할 수 있게 됐다. 젤렌스키는 말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는 ‘남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렇다.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정학적 숙명, 역사적 경험에서 비춰볼 때,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우고 가치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지키는 길임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영토-전쟁-역사-선악-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우리가 늘 접하는 토지문제로 귀착하는 것이 지나친 논리적 비약인가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