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10분,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30분, 지하철을 타고 30분 더. 마침내 을지로3가역에 내려서 10분간 더
걸어가면 출근지가 보입니다. 건물 앞에 줄을 서서 회전문을 통과하고, 긴 엘리베이터 줄에 합류합니다. 마침내 제 자리에 앉아 출근 보고를 마치면 한겨울에도 등 위로 땀이 줄줄
흐릅니다.
출근한 뒤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해방감’입니다. 출퇴근하는 분들이라면 모두 아시겠지만, 오전 시간대 버스,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숨 쉴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마트폰 한 번 보지 못한 채로 껴 있다가, 딱 한 칸짜리 책상에 앉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야 숨을 좀 쉬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끝내 이 안도감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새벽, 저는 부산에 있었습니다. 호텔에서 친구들과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SNS를 보던 한 친구가 이태원에서 100명 넘게 압사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압사? 100명 넘게 죽었다고? 압사의 사가 사(死) 아니라 사(事)였던가?
뭔가 사고가 발생했다는 걸 잘못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회피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안부를 묻는 연락이 잇달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어디냐, 괜찮냐는 메시지가
쏟아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회사 단톡방에서도 무사한지를 묻는 ‘출석 체크’가 시작됐습니다. 이런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는 앞으로 얼마나 달라질까요.
며칠 전 아침엔 종로3가역에서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그만 밀라”고 한소리 했습니다. 평소에는 그 절박한 마음이 이해돼 묵묵히 참는 편인데 말이죠. 제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끝내 만원 지하철에 탑승했습니다. 뉴스를 보니 몇몇 역에선 승객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를 두고 탑승하는 사례도 있었더군요.
이번 이태원 참사의 원인이 우리 사회가 ‘고밀’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출퇴근 시간대 만원 지하철에 끼어 타는 사람을 기꺼이 이해하려 하는 것처럼요.
연합뉴스가 SKT의 지하철 혼잡도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퇴근 시간 1호선 구로역에서 구일역 방면으로 가는 열차 내 혼잡도는 252%라고 합니다. 1㎡당 6.6명이 서 있는 상황인
겁니다.
사고가 난 이태원의 내리막 골목은 약 180㎡인데, 1,000~1,200명이 몰렸다고 추정되니 1㎡당 5.42명이 서 있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서울지하철 혼잡도가 사고 당시 이태원의 상황을 뛰어넘는 셈입니다. 서울시는 지하철역 안전 문제를 긴급 점검하겠다고 밝혔고, 국토교통부도 출퇴근 시간 비상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얘기, 저만 익숙한가요? 지하철 혼잡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특히 코로나19가 우리 세상에 온 이후에는 더 경각심이 생겼죠.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자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인구가 늘기까지 했으니까요. 위에 언급한 SKT의 서비스도 코로나19 확산 이후 시작하게 된 거고요.
모두가 문제인 걸 알고 있는데도 해결이 안 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문제라는 뜻일 겁니다. 수요를 줄일 순 없으니 공급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역시 돈이 문제입니다. 철도
사업은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정부가 철도를 건설하려면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쳐야 하는데, 이 관문을 넘지 못하는 사업이 부지기수입니다.
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광역버스 입석률은 지난 6월 기준 4.8%입니다. 그나마 코로나19 이후 버스 이용객이 줄어서 이만큼 낮아진 건데, 최근에는
입석률이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버스를 늘리자니 도로도 이미 과밀하고, 기사도 부족합니다. 코로나19 때 배달업으로 떠난 기사님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단은 ‘역사 내 모니터링 CCTV 설치’나 ‘현장 안전 유도 요원 배치’ 정도의 대책만 언급되는 실정입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사고만은
막겠다는 겁니다. CCTV 아래에 고출력 스피커를 설치한다거나, 혼잡도가 높아지면 자동으로 무정차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고밀 개발에 대한 인식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부는 지난 8월 앞으로 270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요. 이런 어마어마한 공급량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건 도심을 ‘고밀 개발’하도록 길을 열어줄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용적률이 500%를 초과해도 건축을 허가할 방침입니다.
서울시는 이미 ‘비욘드 조닝’을 통해 이런 계획을 차근차근 실현해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용도지역제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적절한 개발을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관련 법적 기반 등이
마련되면 여의도, 강남 등에 5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이 들어설 수 있을 전망입니다. 실제 개발이 이뤄지면 서울의 밀도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인구밀도는 1㎢당 516명인데 서울은 1만 6,000여 명에 이릅니다. 이미 OECD 국가 대도시 중 압도적 1위입니다. 2위인
네덜란드(419명)보다 100명이나 많고, 영국 런던과 일본 도쿄의 3배가 넘습니다. 서울 인구를 분산해야 한다는 주장은 늘 있지만, 많은 인프라가 서울에 집중한 만큼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GTX가 건립되면 좀 나아질까요? 정부는 GTX 역사를 복합 고밀 개발해 ‘콤팩트시티’를 지을 예정입니다. 역에 가까울수록 밀도가 높은 건물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복합쇼핑몰·오피스·복합환승센터 등을 건립하는 방식입니다. 현재 LH가 남양주 왕숙 역사에 주택 2,213가구, 준주택 1,965가구를 짓는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콤팩트시티가 시도된 적이 없는 만큼 걱정이 앞섭니다. 애초 콤팩트시티는 도시 안에서 모든 일을 해결해 이동을 최소화하겠다는 개념입니다. 주거·사무·쇼핑·문화가 모두
걸어서 이동 가능한 곳에서 이뤄지는 거죠. 네덜란드 로테르담,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이 대표적입니다.
콤팩트시티 안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결국 서울 등으로 이동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GTX만 해도 수조 원이 드는 대규모 사업인데, 각종 업무시설과 상업,
문화시설까지 확충할만한 여력이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민간에서 적극적으로 동참할지도 미지수고요.
GTX도 결국 지옥철의 대명사인 ‘김포골드라인’처럼 빽빽해지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대목입니다. 김포 양촌역에서 구래역 등을 거쳐 김포공항역까지 운행하는 이 라인은 출퇴근 시간대
혼잡률이 270%에 육박해 승객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올해 1월 이 노선을 이용하고 “수도권 광역교통망 확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다”고 밝혔었죠.
아파트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가능성이 있는 건물 등은 특별히 안전을 고려해 설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에 시도됐던 방법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은 작년 ‘공공건축물 감염병 예방 특화설계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밀접·밀폐·밀집 등 3밀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이 담겼습니다.
기본적으로 건물에 들어서는 시설을 분산 배치하고, 진·출입구와 동선을 분리합니다. 특히 행정·치안·소방·문화·체육 등 공공서비스가 한데 모인 복합커뮤니티센터 등에서는 각각 시설에
맞는 동선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사고가 발생했던 이태원에서도 이동 동선을 여러 갈래로 나눴다면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은 누구나 참고할 수 있도록 이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는데요, 일선에서 잘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감염병 예방 설계에 관한 관심이 좀 사그라든 것 같지만, 많은 인원이 한 번에 모이는 공연장, 스포츠 경기장 등에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일은 모두 연결돼있습니다. 주거와 교통, 안전은 결코 따로 고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번 이태원 참사처럼 안타까운 일이 두 번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되겠지요. 앞으로의 도시 개발도 좀 더 많은 면을 고려해 세심하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