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월세시대입니다. 올봄 월세 거래건수가 전세를 앞지르기 시작하더니 가을에는 누적 거래량 100만 건을 돌파했습니다.
연간 기준으로 월세 거래건수가 100만 건을 넘은 것은 올해가 처음입니다.
월세 거래건수가 전세를 추월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지요. 전세가 주도해온 우리나라 주택 임대차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겁니다. 물론 전월세신고제 시행으로 그동안 신고하지 않던
연립·다세대주택의 월세 거래 집계가 늘어난 영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급격한 대출금리 상승 여파로 아파트시장에서도 전세 대신 월세를 선호하는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월세가 대세인 세상은 열렸습니다.
전세는 영어로도 ‘전세(jeonse)’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성행하는 독특한 주거형태다 보니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겠죠.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일정 금액을 보증금으로
맡기고 주택을 빌려 쓰다가 퇴거할 때 그 돈을 그대로 돌려받습니다. 말하자면 전세는 개인 간 이뤄지는 일종의 사금융인 거죠. 임대료와 이자를 퉁치는 겁니다. 혹시 보증금이 부족해
은행에서 전세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이자가 월 임대료보다 저렴해 세입자에겐 전세가 유리한 선택지였죠.
그간 전세는 효자였습니다. 집주인에게는 무이자로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 됐고 세입자에게는 다달이 나가는 돈을 아껴 내 집 마련의 종잣돈을 모으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렇게
주택 금융이 미비했던 시절부터 전세는 우리네 임대차시장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전세제도가 뒤안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수치만 보면 그렇습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9월 전국의 전·월세 거래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51.8%로 집계됐습니다. 올해
4월부터 6개월 연속 월세가 전세를 앞지른 겁니다. 올해 9월까지의 누적 전·월세 거래량을 봐도 월세 비중이 51.8%로 절반을 넘습니다.
최근 들어 중개시장에 전세물건이 쌓이면서 전셋값이 하락했지만 그럼에도 월세를 선호하는 수요자가 더 많다고 현장 관계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앞으로 전·월세 거래량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전세의 월세화 추이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일입니다. 2011년 현대경제연구원은 ‘주택 임대차시장에서 전세가 감소하고 월세가 증가하고 있다. 전세제도의 중장기적
소멸이 불가피하므로 월세 전환에 따른 서민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사전 대응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연구보고서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무려 11년 전부터 임대차시장은 구조적 전환기에
놓여 있었던 거죠.
그러나 2020년 여름, 그 속도가 가팔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월세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신고제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임대차3법’ 도입이 시발점이 됐죠. 당시 부동산
전문가들은 전세의 월세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일제히 내놨습니다. 저금리 기조와 정부의 부동산 보유세 강화 조치가 맞물려 전세 대신 월세를 내놓는 집주인이 늘어날 것이라고
했죠.
예측대로였습니다. 신규 전세물건이 줄고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집주인이 늘면서 전셋집은 귀해졌습니다. 전세대란 속에서 전셋값은 치솟았고 전세를 찾던 세입자도 울며 겨자 먹기로
월세를 택했습니다.
2년이 흐른 지금 주택시장 상황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집값 오름세는 꺾였고 전셋집 품귀현상은 사라졌습니다. 전셋값 상승 흐름도 수그러들었죠. 그럼에도 전세의 월세화는 여전히,
그리고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금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연이은 금리인상으로 대출이자가 오르다 보니 전세 대신 월세를 택하는 세입자가 늘어난 겁니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로 추가
대출여력이 없어 불가피하게 반전세로 전환하는 가구도 늘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월 임대료가 대출이자보다 낮아지는 역전현상이 본격화되면서 세입자에게도 전세보다 월세가 유리한 상황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입니다. 실제 지난 10월 말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전세대출 금리는 연 4.91~7.23% 수준으로 최고 금리가 7%를 넘어섰습니다. 지난해
6~7월 2~3%대를 유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훌쩍 뛴 겁니다.
예를 들어 보증금 4억 원짜리 전셋집이 있다고 해보죠. 세입자가 은행에서 연 7% 금리로 4억원을 빌리면 매달 이자만 233만 원씩 내야 합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추가 인상을
예고하고 있는 만큼 변동금리라면 이자 부담은 더 늘어나겠죠. 반면 이 집을 월세로 한다면 월 임대료는 법정 전월세전환율 5%를 적용했을 때 167만 원입니다. 지난 8월 기준 전국
아파트의 전월세전환율인 4.8%를 적용하면 160만 원 수준이죠. 세입자로서는 은행에 얼마나 더 오를지 모르는 이자를 내는 것보다 집주인에게 2년간 고정된 월세를 지불하는 게 나은
상황인 겁니다.
‘깡통전세’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큰 이유입니다. 깡통전세는 주택담보대출과 전세 보증금이 매매가를 웃돌아 전세 계약이 끝난 뒤 세입자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집값 하락 여파로 보증금을 다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보증금 일부를 월세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월세화 흐름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금리 민감도가 커진 상황에서 금리인상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전세의 월세 전환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는 게 주된
이유입니다. 특히 저금리 시대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월세를 요구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세입자가 월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월세화 현상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뒤안길을 걷고 있는 전세제도가 결국엔 사라질까요. 사실 전세가 언제까지 명맥을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전세 종말을 예견하는 이들이 있지만 전세제도가 완전히
없어지긴 어렵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전세의 월세화 흐름이 뚜렷했지만 주택가격 상승과 함께 전세거래가 다시 활발해진 바 있습니다. 월세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래도 금리인상 랠리가 끝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